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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읽기] 2024년에 탄생할 미국 권력의 중요성

신대륙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언덕 위에 빛나는 도시’라며 미국을 건국했다. ‘언덕 위에 빛나는 도시’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번영이 넘치는 크리스천들의 이상 국가라고 스스로 정의한다. 그 후 미국은 자신의 것이 최고이고 어디에서나 일등이어야만 했다. 자신들의 결정에 동의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틀린 것이다. 물론 이때의 미국은 청교도에 뿌리를 둔 백인사회를 뜻한다. 하지만 지배종족의 오만과 편견, 그리고 탐욕의 문제가 국내에서는 인종 문제로 폭탄이 되었고, 국제사회에서는 글로벌 제국이라는 눈총과 비판을 받게 됐다.  미국은 괴물인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44년 7월,  연합국의 대표자들이 미국 뉴햄프셔주의 브레턴우즈에 모였다.  독일과 일본의 패배가 예상되는 전후 세계에 대비한 통화금융회의인 그 유명한 ‘브레턴우즈 회의’다. 국제통화제도의 기준을 미국 ‘달러’로 정했고 달러를 공급하는 기구로 국제통화기금(IMF)과 후진국개발을 위한 국제개발은행(IBRD)을 설립했다. 이로써 미국 달러 중심의 국제경제, 무역체제(Bretton Woods System)가 구축되었다. 국제경제의 패권이 미국의 손으로 들어왔다.     미국은 국제무역과 금융 시스템을 개발하여 세계 경제성장의 성과를 냈다. 동시에 동맹국에 안보 우산을 제공하기 위해서 NATO를 창설했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란 조직도 만들어서 그들만의 공동정책을 수립했다. 이러한 시스템은 20세기 후반 어떠한 제국도 해내지 못했던 세계 지배력을 달성했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 상황이 달라졌다. 새 천 년이 시작될 무렵 OECD 국가들은 세계 생산량의 80%를 차지했지만, 지금은 60%로 낮아졌다. 그리고 그 비중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개발도상국들의 성장을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발도상국들은 경제적 영향력을 정치적·외교적인 힘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더 나은 무역 및 금융 협정을 원했다. 선진국 기업들에 필요한 두 가지 자원, 즉 성장하는 시장과 풍부한 노동력을 협상 카드로 전환했다. 이와 같은 조짐이 처음 나타난 것은 1999년 시애틀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회의에서다.     이 회의에서는 개발도상국들이 힘을 합쳐 선진국들이 만든 국제규칙을 거부했다. 그 이후로 개발도상국들은 세계은행과 IMF에 대한 의존도를 점차 낮추고 새로운 대출기관을 설립했으며 달러 의존도를 줄이는 무역협정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개발도상국들은 이제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를 갖게 되었다. 또한 이들 국가는BRICS(중국.인도.러시아.브라질 4개 국가가 세계 경제 상황 개선과 금융제도 개혁을 위해서 2009년에 설립한 경제협력체) 및 OPEC(석유수출국기구)과 같은 기관을 통해 경제적 영향력을 국제사회 정치적인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있다.     중국의 부상이 과연 미국에 불편하기만 할 뿐인지 아니면 실제 위협인지 냉정하게 따져봐야 할 때다. 힘의 논리로 밀어붙이면 그것은 제국의 방식이다. 질병, 기후변화, 빈곤 등 인류가 직면한 긴급한 위험에 공동대처하지 않고 독단적 방식을 택하는 것도 제국이다. 중국의 군사력 확대에 대한 대응이 미국의 이익만을 옹호하는 방식이라면 그것도 제국의 방식이다.  과거의 영광을 회복한다며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고집하면 그것도 제국의 방식이다.     사실, 지금의 미국은 전쟁 후 수십 년 동안 행사해 왔던 경제, 정치적 지배력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미국을 제국이라고 하면 시민 입장에서 편하지는 않지만 그런 모습들이 많이 보인다.     과거 로마제국도 당시 전례 없는 수준의 패권을 누렸다. 좀처럼 약해질 것 같지 않았던 로마제국의 쇠락도 사실은 스스로 그 몰락의 씨앗을 뿌렸다. 주변 지역의 경제적 착취를 통해 부강해지고 국경을 넘고 바다를 건너면서 지배영토를 확장한 제국은 다른 민족. 다른 종교를 억압하고 탄압하면서 쇠락의 길로 갔다. 침략과 지배를 통한 제국의 몰락은 인류역사에 그 교훈이 적지 않다.     작심하고 튀르키예를 여행했다. 대륙의 접점에서 문명의 교차를 반복해서 경험하는 이스탄불의 굴곡 많은 역사의 흔적을 봤다. 인종과 종교가 섞여 부딪혔을 때 어떤 과정으로 결론이 났는지, 그리고 또다시 시작된 질서의 체제가 어떻게 유지되어 흘러왔는지를 살펴보려고 했다.     아시아와 유럽이, 그리고 지중해와 흑해가 교차하는해협에서 미국을 생각해 보았다.  2024년 미국의 선거가 어떤 권력을 만들어 내는가는 그야말로 인류의 사활적인 문제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김동석 / 한인유권자연대 대표워싱턴 읽기 미국 중요성 세계 경제성장 국제경제 무역체제 경제적 영향력

2023-09-06

[워싱턴 읽기] 캠프 데이비드 3국 정상회담이 남긴 궁금증

2009년 출범한 오바마 정부 앞에 중국은 공룡이 되어 나타났다. 9·11사태 이후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이 중국의 영향력은 상상 이상 커졌다. 미국의 위치가 흔들릴 정도였다.     당시 오바마 대통령과 바이든 부통령은 중국의 도전을 해결하기 위해서 외교·군사 전략을 중동에서 아시아로 옮겼다. 소위 오바마의 ‘피봇 투 아시아(Pivot to Asia)’전략이다. 백악관은 미국이 태평양 강국임을 선언하면서 우선 중국의 팽창을 지역에 묶어두기로 했다. 일본 내 미군 기지를 정비했고 호주에 해병대를 배치했으며, 필리핀 군사기지를 확장했다. 환태평양 12개국을 중국에 대항하는 체제로 묶었다.     중국은 이를 냉전 방식의 중국 봉쇄로 이해해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의 영토 주장을 강화하고 대만을 겨냥 ‘하나의 중국’원칙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러한 중국의 입장은 시진핑 체제가 되면서  더 강화됐다.       중국을 지역에 묶어두기로 한 백악관과 국무부 내 전략가들의 공통점은 일본 중심주의자들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바이든 부통령의 보좌진은 커트 캠벨, 엘리 래트너, 제이크 설리번, 앤소니 블링컨, 제프리 프레스콧, 사만타 파워, 웬디 셔먼, 다니엘 럿셀 등이었다.       오바마 정부 외교·안보팀의 ‘중국 묶어두기’ 전략 핵심 가운데 하나가 한·일 관계의 밀착이다. 일본에 대해서는 못할 것이 없었지만 한국은 사정이 달랐다.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묵인, 2002년 발생한 ‘미순·효순이 사건( 한국 여중생 2명이 미군 장갑차에 압사)’ 등으로 반미 감정이 남아있었고, 노무현 정부의 과거사 바로 잡기 운동으로 한·일 관계도 껄끄러웠다. 양국은 일본군 강제 위안부, 강제 노역, 독도 영유권, 동해 표기 문제 등으로 갈등이 격화됐다.   일본은 지속된 경제 침체로 우파가 정권을 장악했다. 고이즈미에 이어 아베가 총리에 올랐다. 미국은 한·일 관계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바마 정부의 외교팀은 한국대사관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한·일 관계 개선 가능성을 타진했다.       아베가 총리 복귀 후 워싱턴 방문을 앞두고 있을 무렵 미국의 ‘중국 압박·봉쇄 전략’ 실무 핵심인 웬디 셔먼 국무부 차관이 서울을 방문했다. 당시 셔먼 차관은 “과거의 적을 비난해서 값싼 박수를 얻고 있다”며 일본군강제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의 사과를 요구하는 한국 정부와 국민을 비판했다. 아베의 워싱턴 방문과 한·미·일  3각 동맹이란 미국의 동북아 전략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셔먼의 이 발언은 한국은 물론 미주 한인사회에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한인들은 연방의회로 달려갔다. 한인들의 성화에 연방의원들은 국무부에 “미국에 인권을 앞서는 어떤 전략도 없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에 국무부도 진실에 기초한 과거사 정리 없이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밀착시키는 일이 가능하지 않다며 한 발 물러섰다.       바이든의 외교·안보팀이 2021년 백악관으로 돌아왔다. 중국은 더 위협적으로 커졌다. 바이든은 대통령 선거 당시 동맹을 결속시켜 망가진 국제 사회 내 미국의 지도력을 회복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미국의 외교 전략을 위해 한국과 일본이 긴밀하게 협력하는 문제는 더 중요해졌다. 백악관엔 캠벨이, 국무부엔 셔먼이 다시 중심에 포진했다. 이들의 동북아 외교 전략 공통점은 일본을 중심으로 하고 한국을 달래 끌어들인다는 것이었다.      지난 4월 한국의 윤석열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미국을 국빈 방문했다. 그리고 얼마 후 캠벨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인도태평양 조정관이 곧 물러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리고 바이든 정부에서 국무부 내 2인자로 등장했던 셔면 부장관은 지난달 사임했다. 셔먼 부장관의 사임과 관련 “우선 할 일은 했다는 선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캠프 데이비드 3국 정상회담이 발표되었고, 회담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바이든 대통령은 회담 후 공동기자회견에서 “여러분, 내가 행복해 보인다면 그것은 정말로 행복하기 때문”이라며 회담 결과를 만족스러워했다.     그런데 새 시대를 열었다는 캠프 데이비드 3국 정상회담에서 역사적 사실인 강제위안부 문제, 강제 노역 문제, 독도 문제는 어떻게 돌파했는지 아무도 설명하지 않고 누구도 묻지 않는다.     이런 의문을 갖는 필자가 이상한 것일까?    김동석 / 한인유권자연대 대표워싱턴 읽기 데이비드 정상회담 정부 외교 전략 핵심 한국 여중생

2023-08-22

[워싱턴 읽기] 뉴딜 정책과 ‘월가의 반란’

주식시장의 대폭락으로 미국 경제는 바닥을 쳤다. 직장을 잃은 1600만 명 이상의 실업자가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5000개 이상의 은행이 도산했다. 수백만 가구가 집을 잃었고 금융 자본가들은 수백만 명의 고객을 사취하고 시장을 조작했다. 실업보험, 최저 임금, 사회보장 또는 메디케어와 같은 정부 안전망은 어디에도 없었다. 1929년 미국의 대공황(Great Depression)이다.     국가의 총체적인 위기에 직면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서는 국가의 개념 자체를 바꾸어서 역할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것이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New Deal)’이다.     ‘뉴딜’이라는 말 자체가 ‘새로운 판’이다. 즉 조세정책과 정부 지출 사회기반 시설 확충과 사회 안전망 구축 등과 같은 정부의 적극적 개입을 통해 공평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고 핵심적 임무임을 분명히 했다.     ‘뉴딜’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경제정책이란 차원을 넘어서 국가의 개념과 역할을 재정립한 철학이다.     금융규제의 틀, 노동자 권익보호, 사회 안전망 구축 등 이전에 없던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 운용하고 감독하는 주체로 정부를 규정했다.     당시 뉴딜정책의 엄청난 성공으로 루즈벨트는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4회 연임 대통령이 됐다. 뉴딜을 통해 미국은 1930년대의 대공황을 극복하고 국민들의 적극적 협력으로 2차대전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 후 지금까지 경제적 풍요의 시대를 누리면서 세계적인 강국이 됐다.     서민과 중산층 살리기에 역점을 둔 뉴딜에 공화당과 부유층 그리고 기업가나 금융인들은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대공황의 원인 제공자인 은행에 다양한 규제가 가해지고 기업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규제가 실행됐다. 흔히 월가라고 불리어지는 금융업계의 불만은 엄청나게 커졌고 기업인들은 정부가 기업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루즈벨트의 대담한 뉴딜 실험은 상류층을 격분시켰고, 이 정책이 급진적일 뿐만 아니라 혁명적이라고 생각했던 미국의 가장 강력한 은행가, 기업가, 월스트리트 중개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폭주하는 정부 지출로 인해 개인 재산을 잃을까 걱정하는 자산가들이 모였다. 이들은 루즈벨트 대통령을 몰아내고 친자본 친기업 형태의 파시스트 정부를 수립하려는 구체적인 쿠데타를 모의했다. ‘월가의 반란(Wall Street Putsch)’이라고 불리는 1933년 발생한 쿠데타 음모다.     이 쿠데타의 고위 설계자는 미국의 내로라하는 대기업 회장과 중역들이다. 금융업의 대부인 ‘스텐리 모건’의 회장, 폭발물 및 화학 제조 대기업인 듀퐁 그룹의 ‘이레네 듀퐁’회장, ‘로버트 클라크(재봉틀회사로 유명한 싱어회사의 회장)’ 제러널 모터스, 제너럴 후드, 선 오일, 레밍턴, 굿이어 맥스웰 하우스 등 대기업들이다.     이들 기업인들이 자금과 무기를 준비하고 50만 명에 이르는 1차 대전 참전 군인들을 동원 워싱턴으로 진격해서 루즈벨트 대통령을 체포 파시스트 정권을 수립할 계획을 세웠다.     쿠데타의 지휘관으로 당시 군내에서 신망이 높은 ‘스매들리 버틀러’ 장군을 섭외했는데 이를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한 버틀러 장군이 FBI의 ‘후버’ 국장에게 신고해서 쿠데타는 사전에 저지되었다.     당시 이 사건이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는 쿠데타를 설계하고 모의한 자들이 뉴딜에 협조한다는 조건으로 루즈벨트 대통령이 이들의 처벌을 면제해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는 군국주의, 백인 우월주의, 남성숭배와 같은 20세기 초 제국주의의 기초가 된 이념의 작동을 간파하고 있다. 이와 같은 우익의 집단적 심리를 충동질해서 새로운 환상과 결합하여 미국의 불안을 증폭시키는 전문가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근현대 역사를 모르거나 무시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행태의 트럼프를 국민 절반가량이 왜 그를 지지하고 따르는지에 관해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나 트럼프가 주도하는 운동, 즉 연방의사당을 습격하고 선거를 뒤집으려 하고 국가의 기밀을 빼돌리고 하면서 지금도 여전히 재집권을 꿈꾸는 트럼프의 운동이 분명한 것은 미국의 과거에 확고하게 뿌리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제국주의의 기초가 된 탐욕, 편협함, 무력주의를 해결하지 않고는 미국이 걸어온 흑역사는 반복될 뿐이다.       김동석 / 한인유권자연대 대표워싱턴 읽기 뉴딜 정책 당시 뉴딜정책 루즈벨트 대통령 뉴딜 실험

2023-08-08

[워싱턴 읽기] 선거판의 공화당 이해하기

현재 미국 공화당의 정치 노선은 과거의 공화당과 정 반대다. 미국 정당의 역사는 19세기 초반부터다. 독립전쟁 직후 미국의 정치는 강력한 중앙 정부가 필요하다는 조지 워싱턴 중심의 연방파와 토머스 제퍼슨이 앞장선 반연방파로 나뉘었다. 이 두 집단이 미국 정당 역사의 시작이다. 반연방파의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연방은행 설립을 반대하고, 인디언을 추방하고, 노예제도 확대 정책을 펼치자 이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이 휘그당을 만들었다.     서부 개척시대로 접어들어 새로운 주가 만들어질 때마다 노예제 찬성과 반대가 반복되었다. 1854년 의회는 노예제도를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이 대거 휘그당으로 몰리면서 새로운 정당인 공화당을 창당했다. 1860년 노예제 전면 폐지를 기치로 내건 공화당의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남북전쟁, 노예해방을 이끈 공화당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공화당은 ‘링컨의 정당’, ‘노예 해방’ 정당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1968년 대통령 선거는 공화당의 닉슨, 민주당의 험프리, 그리고 독자 후보로 나선 조지 월리스 앨라배마 주지사의 삼파전이었다. 닉슨은 흑백차별을 내세운 월리스에게 남부의 아칸소,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앨라배마, 조지아에서 패했다. 심지어 공화당 안방인 텍사스에서는 험프리에게 졌다.     닉슨은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다음 선거가 불안했다. 이전의 1964년 대선에서는 배리 골드워터 공화당 후보가 민주당의 존슨에게 완패했지만 남부 6개 주에선 승리했다. 특히 딥 사우스의 중심인 조지아에서의 공화당 승리는 사상 처음이었다.       닉슨 대통령은 64년과 68년 대통령선거 결과에 주목하며 1970년 그의 첫 중간선거 전략을 짰다. 그것이 캠페인 전문가들에게 전설처럼 내려오는 ‘닉슨의 남부전략(Southern Strategy)’이다. 닉슨의 남부전략은 미국 정치의 전통적인 구도를 바꾸었다. 닉슨의 남부전략이란 남부 백인의 인종주의를 자극해서 흑백 간 갈등 문제와 그에 연관된 사회 문제들을 최대한 증폭시키는 것이다.     남부 주들의 인종차별 정책을 옹호하고 ‘남부 주의 권리(State’s Rights)’를 존중한다는 메시지다. 남부 백인들에게 ‘주 권리’라는 용어는 흑백차별, 인종주의의 지속을 의미하는 용어다.  ‘노예제여 영원하라’고 외치면서 64년 대선에서 조지아주를 포함 6개 주를 석권한 베리 골드워터의 전략에 착안한 것이다.     닉슨의 남부 전략은 공화당의 극우적 메시지를 미국 사회에 전파하고 이에 대한 미 국민의 지지 여부를 확인했다. 닉슨은 1972년 선거에서 남부를 휩쓸었다. 닉슨의 남부전략은 남부가 민주당의 아성에서 공화당의 텃밭으로 바뀌는 정치적 대전환기를 만들었다.     미국 정치 흐름을 남부가 주도한다고 해서 캠페인 전문가들은 이것을 ‘미국의 남부화(Southernization of America)’라고 설명한다. 남부는 원래 민주당의 안방이었다. 64년 골드워터의 등장 전까지 딥 사우스 지역에 공화당 소속 연방상원의원은 한명도 없을 정도였다. 60년대 초 민주당이 각종 민권법을 만들고 흑백 평등과 통합정책을 추진하면서 남부의 백인들은 민주당에 배신감을 갖게 되었다.     바로 이때 닉슨이 파고 든 것이다. 닉슨의 남부전략은 인종문제에 여성과 기독교 이슈를 추가했다. 여성해방 운동에 반감을 가진 남부 여성들과 남성우월주의 성향이 강한 남부의 백인에 집중했고 남 침례교단의 기독교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계열의 범 개신교를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였다.     공화당은 어떤 이슈가 기독교인의 정치적 선택을 좌우하는지를 간파했다. 그것은 여성평등권, 낙태문제, 복지제도, 동성애 문제 등이다. 민주당이 추구하는 가치(Value)가 반기독교적이란 공세가 먹히면서 순식간에 남부는 공화당의 안방으로 변했다. 근본주의 기독교인들과 백인우월주의자들은 공화당을 지지하기보다는 민주당과 연방정부를 전투적으로 공격하기도 한다.    닉슨 이후 지금까지 공화당과 보수 세력은 이러한 방식으로 선거를 치렀다.  2016년 도널드 트럼프는 이를 십분 활용해 대통령에 당선됐다. (트럼프 당선의 일등공신인 로저 스톤이란 정치 브로커는 자신의 등에 닉슨의 얼굴을 새기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공화당의 남부전략이 미국 사회에 남긴 상처와 후유증은 막대하다.  ‘미국의 남부화’는 인종차별주의, 반이민주의, 기독교 근본주의, 백인우월주의가 그 중심에 있으며 점점 폭력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  2024년 대통령 선거의 “왜 또 트럼프인가?”에 대한 답이다.     김동석 / 한인유권자연대 대표워싱턴 읽기 선거판 공화당 정당인 공화당 현재 공화당 닉슨 민주당

2023-07-25

[워싱턴 읽기] 2024년 대통령 선거에 ’또 트럼프‘인 이유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의 대통령 선거는 누가 봐도 민주당의 조 바이든 후보에게 유리해 보였다. 비대면 선거운동만 가능해 트럼프는 현직 프리미엄을 활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투표 방식도 우편투표였다. 당연히 투표율 상승이 예상됐고 이는 민주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전통적으로 공화당 유권자는 민주당보다 숫자는 적지만 투표 참여율이 높고, 민주당 유권자는 참여율이 낮은 편이다. 그래서 선거마다 민주당의 캠페인 목표는 투표율을 높이는 일이다.     팬더믹 상황에서의 우편투표는 등록된 유권자에게 투표용지를 우편으로 보내고 우편으로 수거하는 방식이었다. 트럼프가 주장하고 있는 부정선거란 바로 그 우편행정 과정에서 조작이 있었다는 것이다.     보통 대통령선거 투표율은 50% 중반이 평균치인데 2020년 대선은 67%를 기록했다. 역사상 최고의 투표율이다. 일부 전문가들이 우편투표가 아니었으면 조 바이든이 이길 수 없었던 선거라고 말하는 이유다.       트럼프의 재선 캠페인 전략은 지지층 결집을 통한 바람몰이였다. 국정운영의 성과를 평가받는 방식은 자신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본인이 잘 알고 있었다. ‘내편과 네편’으로 나누기만 하면 신기할 정도로 각종 SNS가 자동으로 범보수주의 우파를 공화당으로 결집했다.     트럼프는 재임 중 3명의 대법관을 보수주의자로 임명했다. 숫자상으로 다수이고 투표율과 결집력이 가장 높은 기독교 우파들이 트럼프의 대법관 구성에 열광했다. 그들의 반세기에 걸친 목표였던 연방대법원의 보수 우위 시대를 트럼프가 만들어냈다.     세계적인 전도자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아들인 프랭크 그레이엄 목사는 재선에 나선 트럼프 지지 집회를 이어갔으며, 공화당 전당대회에 참석해 트럼프에게 하늘의 축복을 빌기도 했다.  남부 침례교단은 트럼프를 위한 기도회를 추진하고 모금 운동을 펼쳤다. 미국 기독교연맹 회장인 랠프 리드는 트럼프의 재선만이 기독교 가치를 지킬 수 있다는 성명서를 내기도 했다. 집권 4년 동안 트럼프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율은 바닥을 면치 못했지만 지지층은 결집이 되었다.     2020년 10월2일,  선거를 코앞에 두고 트럼프 대통령 부부가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선거운동에 비상이 걸렸다. 주치의의 의견을 무시한 채 트럼프는 격리 치료를 받던 군 병원에서 거의 탈출하다시피 했지만 가장 중요한 선거운동 기간의 열흘을 잃어버렸다. 이때의 열흘이라는 시간은 그 이전의 열달과 맞먹기 때문에 트럼프 캠프에는 초비상이 걸렸다.  당시 트럼프 캠프는 5개의 경합주( 플로리다, 펜실베이니아, 애리조나, 노스캐롤라이나, 위스콘신 )를 직접 순회하면 우편투표 방식이라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트럼프는 병원서 뛰쳐나오자마자 이들 5개 경합주 가운데 플로리다를 집중적으로 방문해 막판 뒤집기에 성공했다. 반면 펜실베이니아는 1.1%p, 조지아는 0.7%p, 위스콘신은 0.6%p, 애리조나는 0.4p% 차이로 졌다.)     트럼프 지지층의 결집은 성공적으로 평가되었다.  트럼프는 선거에서 패했지만 2016년도에 비해서 1000만표 이상 더 얻었다. 공화당 대선후보로는 역사상 최다득표였다.     선거를 코앞에 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병원 신세를 지게 되자 워싱턴DC에서 범 보수주의 세력의 비상 회의가 소집됐다. 이때 국가정책위원회(CNP)라는 단체가 나섰다. 국가정책위원회는 미국 보수주의 거물들의 모임이라는 정도만 알려졌지 회원이나 운영 방식은 철저한 비밀이었다. 일부 언론에 미국 보수주의 및 공화당 활동가를 위한 전국적 우산조직이라는 정도만 소개될 정도였다.  최근에야 일부 유출된 회원 명단을 통해 억만장자들과 유명 공화당계 정치인들, 보수우파 기독교 지도자들, 보수주의 미디어 그룹 소유주들, 퇴역 장성들이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트럼프 재선에 빨간불이 들어오자 이들이 황급하게 움직였지만 조기투표, 사전투표, 우편투표 덕분에 2020년 선거는 결국 조 바이든이 당선되었다.     2009년 첫 흑인 대통령 탄생에 자극을 받은 우파들은 점점 더 결집하여 범 보수주의 정치연대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2010년 ‘티파티’라는 우파들의 사회운동이 일어났고, 그들이 정치권에 진입해 반 지성적인 우파 이념으로 보수주의 공화당을 접수했다. 그들은 마침내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었고 그 기세를 몰아서 2024년 다시 백악관을 향해서 돌진하고 있다.     최근에도 국가정책위원회가 노골적으로 움직인다는 뉴스가 간간이 나온다. 본격적인 선거전으로 돌입하면서 신경이 곤두서는 이유는 ‘또 트럼프’를 용인하는 미국의 사회·정치적 변화의 흐름이 소수계인 우리에겐 거의 공포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김동석 / 한인유권자연대 대표워싱턴 읽기 대통령 트럼프 보통 대통령선거 대통령 선거 범보수주의 우파

2023-07-11

[워싱턴 읽기] 내년 대통령선거 초반전의 변수

‘노 라벨스(No Labels)’는 중도와 초당 주의를 표방하는 민주당 내 중도파들이  2010년 조직한 비영리 정치조직이다. 오바마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의 정치권이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을 보이는 상황에서 태동하였다.     2008년 대통령선거전에서 존 매케인 후보의 러닝메이트였던 세라 페일린을 중심으로 한 우파의 정치세력화가 ‘티파티 운동’이었고, 이에 맞선 진보적 정치참여 운동이 ‘무브 온’이다. ‘노 라벨스’는 양극의 중간지대쯤에 위치한다. 이 단체의 창립자이면서 현재 회장은 오랜 기간 클린턴 부부를 후원했던 낸시 제이컵슨이다. 제이컵슨은 오랫동안 클린턴의 최측근으로 정치고문 역할을 했던 마크 펜의 아내다.  그래서 혹자는 ‘노 라벨스’를 빛깔은 민주당이고 내용은 공화당이라고도 한다.         ‘노 라벨스’는 20여 년 이상 중도주의 정치인들을 연방의회에 진출시키는 일을 해 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노 라벨스’는 연방하원 내에 ‘프로블럼 솔버스 코커스(Problem Solvers Caucus)’를 결성했다. 이념적으로 중도주의라고 할 수 있는 민주당에 가까운 공화당 의원, 공화당에 가까운 민주당 의원들 60여명을 모아 2017년 출범했다.     이들은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을 보이는 연방하원 내 중간지대에서 균형을 틀어쥐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부터 지금까지 양당의 정쟁으로 의회가 분열과 갈등의 혼란을 겪고 있지만 그나마 몇 가지 필수 현안의 입법이 가능했던 것은 이 ‘브로블럼 솔버스 코커스’ 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작년에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바이든 정부의 ‘더 나은 재건(Build Back Better Act)’법안을 조 맨친 상원의원을 설득, 공화당과 협상을 통해 입법화 하기도 했다.     재선의 영 김 하원의원은 “대화하고 협상하고 협력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곳이 의회다. 시민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것”이라면서 이 단체에 합류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프로블럼 솔버스 코커스’는 ‘노 라벨스’가 내세우는 가장 큰 성과중 하나다.     이 ‘노 라벨스’가 2024년 대통령선거의 독자 후보를 추진하고 있다. 미국 대선에서 제3의 후보는 종종 있었다. 1992년 아버지 부시 대통령과 클린턴 후보의 경쟁 당시 로스 페로가  제3의 후보로 등장했다. 그는 예상을 깨고 전국적으로 20%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당시 주로 공화당 지지층이 로스 페로 쪽으로 이탈한 것이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재선 실패 원인이었다.     2000년 선거에서도 제 3의 후보가 승패에 영향을 끼쳤다. 당시 공화당 후보는 조지 부시 텍사스 주지사, 민주당은 앨 고어 부통령이었다. 제3의 후보는 환경운동가인 랠프 네이더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300만 표 이상을 받았고, 앨 고어가 플로리다에서 근소한 차이로 패한 원인으로 꼽혔다.  그래서 매번 대통령선거 때마다 제3 후보의 등장이 비상한 주목을 받는다.     지난 6월6일 워싱턴 DC의 ‘노 라벨스’ 사무실에 사람들이 모였다. 이날 약 40여 명이 참석했고 회의는 줌으로도 진행됐다. 바이든 대통령의 보좌관을 비롯해 전 상·하원 의원, 이제 막 출범한 바이든 대통령 재선 전략팀원들, 그리고 민주당의 최고 캠페인 전략가들이 참여했다. 그들만이 아니다. 2020년 선거전에 반트럼프 운동을 추진한 공화당 내 링컨 프로젝트(Lincoln Project) 대표, 그리고 네오콘의 거두로 위클리 스탠더드 발행인을 역임한 빌 크리스톨의 모습도 보였다.  이들의 임무는 노 라벨스가 제3의 대통령 후보를 내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바이든 대통령의 보좌관들과 민주당 전략가들은 2024년 대선전이 트럼프와 바이든이 리턴매치가 될 경우 제3의 후보는 바이든을 패자로 만들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하고 있다.     ‘노 라벨스’는 내년 3월쯤 양당 후보가 확정되면 제3의 후보를 결정할 것이라고 한다. 바이든 대통령의 발목을 잡는 조 맨친 상원의원, 트럼프를 가장 강하게 비판해 온 래리 호건 전 메릴랜드 주지사 등이 제3 후보의 물망에 오르내리고 있다.     트럼프는 위험한 인물이고 바이든은 지루하고 무능하다고 생각하는 유권자들이 많다. 이런 평가에도 트럼프 지지자들은 굳건하다. 제3의 후보가 트럼프를 이기기 어려운 이유다. 반면, 상대적으로 지지그룹이 탄탄하지 못한 바이든의 득표에는 영향을 줄 수 있다. 민주당이 ‘노 라벨스’의 움직임에 민감한 이유다.  김동석 / 한인유권자연대 대표워싱턴 읽기 대통령선거 초반전 트럼프 대통령 대통령 취임 매케인 후보

2023-06-27

[워싱턴 읽기] 기독교 복음주의자의 정치 유산

지난주 언론들은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했던 팻 로버트슨 목사의 별세 소식을 비중 있게 다뤘다.  ‘700 Club’쇼로 유명한 로버트슨 목사는 수십년간 TV 시청자들에게 친숙한 존재였다. 그는 1988년 대통령 선거 공화당 후보 경선에 나섰고 기독교 우파의 정치조직인 미국기독교연맹(America Christian Coalition)을 창설해 기독교 우파의 정치세력화에 큰 역할을 했다.     정치 목사로 알려진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의 제리 폴웰 목사가 기독교 근본주의자라면, 로버트슨 목사는 복음주의에 가깝다. 이들은 2016년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일에 적극 참여했다. 세계적인 복음주의 부흥사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아들인 프랭크 그레이엄 목사도, 풀웰 목사의 아들인 제리 폴웰 Jr 목사도 2016년 뿐만 아니라 2020년 대선 때도 트럼프를 적극 지지했다.     1970년대 이후 미국 정치의 가장 큰 불행은 낙후 지역으로 꼽히는 남부로 그 주도권이 넘어갔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2000년 대통령 선거 때 앨 고어 민주당 후보는 전체 득표에서는 조지 부시 후보보다 50만표 이상 많았으나 선거인단 수에서는 부시가 271대 266으로 이겼다. 당시 부시는 남부와 서부를 중심으로 30개 주에서 이겼고, 고어는 동부와 중서부의 21개 주에서 이겼다. 고어는 남부에서 32%의 득표율에 그쳤지만  부시는 66%를 기록했다.     남부는 표 쏠림 현상이 뚜렷하고 투표율도 동북부 지역보다 훨씬 높다.  남부는 오랫동안 보수주의의 주요한 축이었던 남부 전통주의와 기독교 우파의 근거지다. 남부가 미국 정치권의 주도권을 쥐었다는 말은 남부 전통주의와 기독교 우파가 정치적인 지배력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다.     기독교 우파는 종교적 근본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정치권은 종교적 근본주의를 경계하면서도 선거 때마다 기독교 우파를 적절하게 활용한 후에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관리를 해 왔다. 1980년 대통령 선거에서 텍사스 출신의 조지 H 부시를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승리한 레이건 대통령도 당선 후에는 기독교 우파와 적당하게 거리를 뒀다.     기독교 우파는 1986년부터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만들기 시작했다. 기독교 근본주의자인 폴웰 목사의 ‘도덕적 다수’가 그것이다. 기독교 근본주의보다는 다소 유연한 복음주의자를 자처했던 로버트슨 목사는 1988년 대통령 선거 출마 당시 아예 목사직을 내려놓기도 했다. 공화당의 첫 경선이 열렸던 아이오와에서는 조지 부시를 제치고 2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화당 경선에서 3위를 차지한 로버트슨 목사는 전당대회에서 조지 부시 후보를 지지하는 연설을 했다.     이후 그는 기독교 복음주의의 정치세력화에 초점을 맞췄다. 미국기독교연맹을 창설해 기독교 우파의 정치 참여에 매진했다. 로버트슨 목사는 기독교 TV 방송인 CBN(Christian Broadcasting Network)을 성장시켰다. ‘700 Club’의 TV전도사로 유명해진 로버트슨 목사는 복음주의 교단하에 학교와 병원. 그리고 미디어를 세웠다. 교회와 사회의 중간지점에서 기독교 우파를 배출하는 일에 전력을 다한 것이다.  로버트슨, 풀웰, 그레이엄 등 세계적인 TV 부흥 목회자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우파가 대중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     기독교 우파는 처음엔 근본주의가 중심이었으나 나중엔 좀 더 유연하고 대중적인 복음주의가 중심이 되었다. 기독교 우파 정치 세력은 드디어 1994년 중간선거에서 뉴트 깅그리치를 중심으로 한 공화당의 승리를 끌어냈다. 수십 년 만에 공화당이 상·하 양원을 모두 장악하는 데 일등 공신이 되었다.     기독교 우파는 기독교 가치를 훼손한다며 이민을, 성경에 위배된다며 동성애에 반대한다. 그리고 기독교 국가 건설을 목표로 남부지역에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 그들은 생명 옹호를 이유로 낙태권에, ‘절제옹호’를 내세워 성적 자유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이다. 또 여성운동에는 ‘가족옹호’라는 구호로 반대하며 보수주의 운동을 통일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특권은 없고 모두에게 동등한 권리가 있다며 ‘약자보호법(Affirmative Action)’도 반대한다. 아울러 진화론을 배격하고 학교에서 창조론 교육을 주장한다.   기독교 우파는 2016년 선거 당시 ‘우리의 대변자는 아니지만 우리의 목표를 관철할 수 있는 인물’이라며 트럼프를 앞장서 지지했다.       미디어 왕국을 건설하고 그것을 통해 기독교 우파를 정치세력화한 로버트슨 목사는 숨졌지만 그의 유산은 분열과 증오의 ‘트럼프 정치’로 남겨졌다. 과연 예수 정신이 핵심인 기독교의 길인가?  김동석 / 한인유권자연대 대표워싱턴 읽기 복음주의자 기독교 기독교 우파가 남부가 정치권 정치 목사

2023-06-14

[워싱턴 읽기] ‘외교 대통령’으로 불리는 상원 외교위원장

2001년 1월, 버몬트주 출신의 짐 제포드 연방상원의원이 공화당을 탈당했다. 그는 중도파라는 이유로 공화당 내에서 늘 왕따 신세였다. 탈당한 그는 “민주당에 입당은 하지 않겠지만 정책 공조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공화와 민주 의석수가 50대50 동수였고 의장인 딕 체니 부통령으로 인해 겨우 다수당 지위를 유지하던 공화당은 순식간에 소수당으로 전락했다. 민주당은 선거 없이 상원의 다수당 자리를 확보한 셈이다.     의회에서 다수당이 소수당으로 전락하면 모든 상임위원장 자리를 내놓아야 하는 등 엄청난 변화가 뒤따른다. 위원회로 제기되는 모든 안건의 상정과 폐기뿐만 아니라 토의 순서를 정하는 모든 권한이 위원장에게 있는 것을 고려하면 의회에서 다수당이 되는 것은 정당정치 측면에선 대통령을 당선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제포드 의원의 탈당 선언으로 외교정책에선 대통령의 권한을 능가한다는 상원 외교위원장 자리가 하루아침에  민주당의 조 바이든 의원에게 돌아갔다. 상원 외교위원장에서 물러난 노스 캐롤라이나 출신의 제시 헬름스 의원은 미국 외교정책의 중심축을 반공 전략에 뒀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도 환상의 호흡을 맞췄던 인물이다.     상원 외교위원장의 갑작스러운 교체로 행정부는 물론 세계 각국의 외교관들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중국, 러시아, 일본, 인도, 그리고 중동과 유럽 등 전 세계의 외교관들이 눈도장이라도 찍기 위해 바이든 외교위원장이 참석하는 모든 행사장에서 줄을 서 기다리는 장면을 보면서 상원 외교위원장 자리의 무게를 실감했다.             미국 외교 정책의 최종 결정은 대통령이 한다. 그러나 ‘워싱턴의 바이블’이라고 불리는 헌법 1조에는 ‘대통령은 모든 외교조약이나 대사임명에서 상원의 자문과 동의를 구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상원 외교위원회는 대통령이나 행정부의 외교 정책 독주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헌법기관인 셈이다. 그래서 상원 외교위원장을 ‘외교대통령’이라고 부른다.     바이든 위원장은 2002년 중간선거로 공화당에 다시 자리를 내어 주기까지 만 2년 동안 외교위원장을 지냈다. 이로 인해 네오콘이 득세하던 부시 행정부의 강경파들로부터 미국의 북한 공격을 막고 ‘대화와 협상’이라는 평화적 대북 전략의 물꼬를 틀 수가 있었다.     바이든의 대통령 취임 일 년이 훨씬 지나도록 주한 미국대사는 공석이었다. 중국과 일본에는 상원 인준청문회를 거쳐 대사가 부임했음에도 주한국 대사 소식은 감감했다. 미국의 한국 정책이 서울 대사관이 아닌 도쿄나 베이징 대사관의 보고를 토대로 하는 것 아니냐는 염려까지 생겼다.       필자는 속히 한국에도 대사가 부임해야 한다는 의견을 상원 외교위원장실에 보냈다. 답이 없어 반복해서 졸랐다. 드디어 2022년 4월7일 , 상원 외교위원회는 바이든 정부의 첫 주한 미국대사 인준청문회를 열었다. 바이든 정부가 출범한 지 1년이 지난 시점이다.     한국의 중요도(긴요함)를 고려할 때 필자는 내심 다른 나라에 비해 더 거물이 더 빨리 주한국 대사에 임명되기를 바랐다. 한미관계에서 주한 미국대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회가 될 때마다 상원 외교위원장실을 노크했다.     그리고 주한 미국대사의 인준 청문회에 미주 한인들 의견도 반영되어야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전달했다. 이스라엘에 대사를 파견할 때엔 미국 내 유태인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예를 설명하면서 주한 미국대사의 인준 청문회에 필자의 참석을 요청했다.     마침내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이 움직인다는 이야기가 실현됐다. 필자는 2022년 4월7일 상원 외교위원회의 주한 미국대사 인준청문회 참석을 허락받았다. 상원 외교위원장인 밥 메넨데스 의원으로부터 청문회 참관 초청장을 받은 것이다.     필립 골드버그 대사의 청문회를 열면서 메넨데스 위원장은 모두 발언을 통해 주한 미국대사의 업무가 미국 내 한인 디아스포라에도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필자의 이름을 거명하며 잠깐 일으켜 세우기도 했다. 당시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었고 필리핀, 호주, 노르웨이 대사도 심사하는 청문회였기 때문에 민간인의 참관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위원장의 특별 지시가 있어 가능했다.     상원 외교위원장의 절대적인 권한을 실감할 수 있는 일이었다.    김동석 / 한인유권자연대 대표워싱턴 읽기 외교위원장 대통령 상원 외교위원장 동안 외교위원장 상원 외교위원회

2023-05-30

[워싱턴 읽기] 국무부 떠나는 웬디 셔먼을 기억하는 일

1994년 6월 어느 날, 클린턴 대통령은 전쟁 위험까지 감수하며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저지하는 방안을 선택했다. 펜타곤은 대통령에게 세 가지 방법론을 제시했고 클린턴 대통령이 마지막 결정(북한과의 전쟁)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김일성을 만나러 평양에 간 지미 카터 전 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북한이 영변 원자로의 폐연료봉 재처리를 중단하고 미국과 협상 의사를 밝혔다는 것이었다. 전쟁에서 협상으로 역사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1998년 8월 북한의 금창리 핵시설 건설 의혹과 인공위성 발사 실험으로 인해 의회에서 대북 강경기류가 형성되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를 완화하기 위해 윌리엄 페리 전 국방부 장관을 대북정책조정관으로 임명했다. 미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 등 관련국들의 대북 정책도 미국의 입장에서 전면 재검토한 후 보고서를 내도록 지시했다.     한반도 전문가들이 가장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대북 정책 방안으로 여기는 것이 ‘윌리엄 페리 보고서’다. 페리 보고서는 클린턴 정부의 대북정책을 전쟁에서 협상으로 전환했다.     당시 페리 대북정책조정관 밑에서 이 보고서를 입안하고 완성한 사람이 바로 웬디 셔먼이다. 그녀는 이후 대북정책조정관 자리를 이어받았다. 셔먼은 내친김에 메들린 울브라이트 국무장관을 평양으로 인도했고, 북한군부의 실세인 차명록 차수를 워싱턴 DC로 초청했다. 그리고 북미 미사일 협상이라는 결실을 보기도 했다.     셔먼은 이어 클린턴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발표했다. 지금도 한반도 전문가들은 당시 상황을 설명하면서 조지 부시 당시 대통령 당선자의 훼방만 아니었다면 클린턴과 김정일간의 정상회담과 북미수교도 가능했었을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셔먼은 협상 전문가다. 전쟁을 막는 것 이상의 외교적 승리는 없다고 믿는 평화의 소신파이기도 하다. 그녀는 소련이 해체된 상황에서 동북아시아의 목표는 북한임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아시아 쪽에 눈을 돌렸다.  셔먼은 북한을 ‘발톱 밑의 가시’라고 표현하면서 그 가시를 뽑아내려면 잠깐은 아픔이 있다고 설명한다. 1999년 ‘페리 보고서’를 낸 후 셔먼은 울브라이트 국무장관에게 클린턴 대통령이 북한과 종지부(미북 간외교 정상화)를 찍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5년 1월,  마이크 혼다 의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해 5월 워싱턴을 방문하는 일본의 아베 총리가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을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아베는 한인들이 ‘일본군강제위안부결의안’의 연방의회 통과를 추진할 당시 이를 무시했었다. 한인들이 그 일을 해 내리라곤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2007년 7월 결의안이 하원을 통과하자 아베는 격렬하게 반발하며 “한국은 미주 한인이 있는데 일본은 없다”라는 말을 남겼으며 그해 말 총리직을 사임했다.  2012년 다시 총리직에 복귀한 아베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위안부 결의안을 뒤집으려는 의도를 보였다. 그럴때마다 혼다 의원은 필자에게 일본이 결의안을 따르도록 전 세계를 향해 캠페인을 하라고 독촉했다.      2015년 아베의 상·하원 합동 회의 연설은 결국 성사됐다. 아베 연설 저지를 위해 애썼던 필자에게 당시 국무부 정무차관이던 셔먼이 평생 잊지 못할 말을 했다. ‘일본군강제위안부’문제가 한·미·일 공조체제에 걸림돌이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민족 감정은 악용될 수 있으며, 정치 지도자들이 과거의 적을 비난해 값싼 박수를 받으며 국내에서 지지를 얻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러한 도발은 곧 외교의 마비를 초래한다”는 발언을 했다. 현실적인 평화주의자란 평가를 받던 셔면이 인권이란 보편가치를 외교전략 아래에 두는 실언을 한 셈이다. 필자에게 셔먼은더는 평화주의자가 아니고 역사와 철학적 인식이 부족한 전략가에 불과했다.   셔먼이 2021년 출범한 바이든 정부에서 국무부 2인자가 될 것이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오바마 집권 2기에 경쟁자였던 토니 블링컨에게 밀렸다. 힐러리 클린턴과 존 케리가 지원했지만 당시 바이든 부통령이 지지한 블링컨이 국무부 부장관이 됐다. 이후 그녀는 국무부에 남아 이란과의 핵 협상을 주도했다. 시간이 흘러 2020년,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은 셔먼을 국무부 부장관에 임명했다. 블링컨 장관과 질긴 인연이다.     ‘백발의 마녀’로 통하는 웬디 셔면이 이제 국무부를 떠난다,  대북정책조정관으로, 그리고 ‘페리 보고서’ 작성의 주역인 셔먼 국무부 부장관이 6월30일 사임한다는 소식이다. 그녀는 미국의 대북정책에서 가장 현실적인 방안을 마련했지만 아직 미완이다. 셔면은 국무부 직원들에게 사임을 알리며 보낸 서한에서 “아프가니스탄 철군, 중국과의 경쟁, 우크라이나 전쟁 등 어떤 문제도 쉬운 답이 보이지 않는다 ”고 했다.  김동석 / 한인유권자연대 대표워싱턴 읽기 국무부 웬디 이후 대북정책조정관 대통령 당선자 페리 보고서

2023-05-16

[워싱턴 읽기] 백악관에 간 한인 어린이 합창단

지난 4월26일, 오전 9시가 좀 지나면서 백악관의 사우스론(South Lawn)은 미국을 국빈 방문한 대한민국 윤석열 대통령을 환영하는 인파로 붐볐다. 이날 10시에 열린 공식 환영행사엔 7000여 명의 인파가 몰렸고 VIP라인 안에도 취재 기자들과 한국에서 온 대통령 수행원, 경호원 등으로 북적였다.      백악관 본관의 2층 발코니 계단에는 화려한 색상의 한복을 차려입은 한인 어린이 합창단 50여명이 자리했다. 합창단은 양국 대통령 부부가 입장하기 직전에 아리랑과 뮤지컬 ‘애니’에 나오는 합창곡 ‘투모로우(tomorrow)’를 불러 많은 박수를 받았다.       노래가 끝나고 발코니 계단에서 내려온 합창단은 백악관 안으로 들어갔다. 합창단원 40여명과 단장, 지휘자, 피아니스트 그리고 필자는 백악관 본관 중앙홀로 들어가 합창 준비를 했다. 중앙홀은 본관 발코니와 직접 연결된 로비다. 양국 대통령 부부는 발코니에서 환영객들에게 인사를 한 후 중앙홀로 들어오게 된다. 미국 대통령은 공식적으로 이 중앙홀에서 손님을 맞이한다.     합창단은 양국 정상 부부가 발코니 인사를 마치고 중앙홀로 들어오면 45초에서 1분간 아리랑을 부르기로 되어 있었다. 백악관이 자랑하는 그랜드피아노 앞에 피아니스트가 앉았고 지휘자와 단장은 아이들을 진정시키느라 여념이 없었다. 필자도 백악관 NSC(안보실) 직원과 함께 합창단 옆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드디어 로비와 발코니가 연결된 문이 열림과 동시에 환상적인 화음의 아리랑이 울려 퍼졌다. 바이든 대통령은 한복을 차려입은 합창단을 보자 놀란 듯 두 손을 얼굴에 대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질 바이든 여사도 놀라는 표정으로 손자뻘 되는 아이들 앞으로 다가섰다. 순간 필자는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는데 순식간에 경호원이 다가와 전화기를 빼앗았다.     이 ‘1분 이벤트’는 행사 책임자의 아이디어였다. 1차 정상회담에 앞서 양 정상 내외는 VIP 티룸(Tea Room)에서 10분간 휴식을 취하기로 되어 있었고, 티 룸으로 이동하려면 1분 정도가 걸렸다.     그런데 바이든 대통령 내외가 합창단 앞에서 멈춰 버린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을 따르던 윤 대통령 부부도 덩달아 멈췄다. 아리랑 노래가 끝나자 질 바이든 여사가 가장 먼저 환호와 함께   박수를 보냈고 이어 바이든 대통령, 윤 대통령 부부도 함께 했다. 바이든 대통은 합창단 아이들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주고 어깨를 감싸며 격려했고,질 바이든 여사도 아이들을 안아주는 등 흐뭇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바이든 대통령 비서실장이 “그러면 노래를 한 곡 더 들으시죠”라고 대통령께 권했다. 양국 정상 부부가 나란히 섰고 합창단은 야외행사장에서 불렀던 ‘투모로우’를 합창했다.  ‘1분 계획’이 이미 8분을 지나고 있었다. 대통령의 일정을 1분 단위로 챙겨야 하는 수행원들은 안절부절 못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아이들에게 “내가 누군지, 여기가 어디인지 아느냐?”고 물었고 조금은 긴장이 풀린 아이들은 “대통령이요” “백악관이요”라고 답했다. 이어 바이든 대통령은 “너희들 오늘 학교에 가지 않았구나.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자 한 학생이 “뉴저지에서 왔어요”라고 답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나는 뉴저지 옆의 델라웨어에서 왔고, 내 아내는 뉴저지 출신”이라며 아이들의 긴장을 풀어줬다. 그리고 “백악관에 또 와줄 수 있겠니?”라고 물었고 아이들은 “녜” 라고 응답했다. 질 바이든 여사는 합창단에게 다가가 일일이 손을 잡아주었고, 윤 대통령 부부도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바이든 대통령은 황현주 단장에게 어느 학교냐고 물었고 황 단장은 “주말에만 한 번 수업하는 해리티지스쿨(뉴저지 한국학교) 학생들이고 모국 대통령을 환영하기 위해 백악관에 왔다”고 답했다. 대학 교수인 질 바이든 여사는 사무실에서 중간고사 채점을 하다가 여기로 내려왔다고 말했고 황 단장은 “행사를 위해 어제저녁 호텔에서 학부모들과 화상으로 학생들의 성적 면담을 했다”고 답했다. 교사 경력이 있는 질 바이든 여사는 황 단장의 손을 잡고 “교사는 정말로 중요한 직업”이라고 격려하기도 했다.    윤 대통령도 황 단장에게 “작년 뉴욕에서 공연한 합창단이 맞지요?”라고 물었고 황 단장은 “그렇다”고 답했다. ( 뉴저지 한국학교 합창단은 지난해 유엔총회 참석차 방미한 윤 대통령의  뉴욕 동포 환영행사에서 공연을 했었다) 1분으로 예정했던 시간은 벌써 15분이 지나고 있었다. 수행직원이 행사를 마무리 지으려 하자 바이든 대통령은 합창단과 양국 정상 내외의 기념촬영 시간을 가졌다.       당초 백악관은 이 잠깐의 행사를 비공개 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너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일까, 바이든 대통령과 질 바이든 여사는 행사 수 시간 후 각자 트위터를 통해 행사 내용을 공개했다.       과거에도 백악관 고위직에 오른 한인들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백악관에서 근무하는 한인들은 한인사회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남다르다. 본인들도 한인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정체성이 강하다. 이런 생각이 있었기에 윤 대통령의 국빈 방문을 맞아 백악관에 한인 어린이 합창단을 초청할 생각까지 한 것이다.     이번 행사가 성사되는데 핵심 역할을 했던 20대의 한인 백악관 직원은 이날 양복 안에 개량 한복 조끼를 입고 오기도 했다. 한국 대통령이 백악관에 손님으로 오는 것이 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15분 안팎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바이든 대통령 앞에서 씩씩한 한인 어린이들을 보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들이 코리안 아메리칸의 희망이다. 김동석 / 한인유권자연대 대표워싱턴 읽기 백악관 어린이 대통령 부부 양국 대통령 대통령 내외

2023-05-02

[워싱턴 읽기] 기소·재판, 그리고 트럼프의 캠페인 전략

트럼프의 ‘거짓과 억지’가 더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는 사적 욕망이 밑바탕인 사업적 전략으로 정치를 이해했고 또 정치에 관여했다. 그는 망가진 시스템을 다시 작동시키는 방법을 아는 것이 정치라고 이해한다.     트럼프를 제외하고 부동산 사업가 출신 대통령은 없었다. 다른 정치인 중에서도 부동산 사업가 출신은 많지가 않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부동산 사업은 규제가 까다롭지 않고 많은 부채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 시장의 변동성에 취약하다. 또 정부의 정책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사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치도 이런 방식으로 접근한 이가 트럼프다.     그는 민주적 선거가 지도자를 선택하는 유권자의 권한이 아니라 권력을 위해 조작되는 과정이라고 이해하는 모양이다. 아직도 자신의 2020년 대선 패배가 선거 조작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이유가 정치에 대한 이런 접근방식에서 비롯된 듯하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의 45대 대통령이었다는 불편한 진실은 두고두고 미국 정치사에 뼈아픈 교훈으로 남을 만하다.     지난해 중간선거 직후 트럼프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고 영광스럽게 만들기 위해” 2024년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언론들의 비판적 평가가 쏟아졌다. 워싱턴포스트(WP)지는 ‘대통령님 제발 다시 나오지 마세요’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이제 대통령선거는 당신의 일이 아니다’라면서 출마하면 패배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중간선거 책임론을 제기하면서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가 될 가능성은 높지만 트럼프의 정치는 국민에게 악몽이라고 주장했다.  보수 성향의 월스트리트저널(WSJ)도 트럼프의 출마 선언은 공화당원보다 민주당을 더 기쁘게 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트럼프를 가장 쉽게 이길 수 있는 후보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여기에 공화당의 스타로 떠오른 론 드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의 지지도가 트럼프를 앞서는 것으로 나오면서 트럼프의 공화당 후보 가능성은 점점 낮아지는 듯했다. 적어도 3월 중순까지는 그랬다. 론 드샌티스와 마이크 펜스가 트럼프와 경쟁하면서 트럼프의 영향력이 약해지기를 희망하는 공화당원도 많았다. 워싱턴의 정치 전문가나 매체들은 이제 트럼프정치가 지나간다는 전망을 하기도 했고, 전통적 보수진영에서는 새로 출범한 118회기 연방하원에 대해 ‘공화당의 제자리 찾기’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 3월18일 토요일 아침 트럼프가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올린 한 개의 게시물이 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2016년 대선 당시 ‘포르노 스타와의 성관계 입막음’ 의혹으로 검찰의 기소가 임박했음을 감지한 트럼프가 지지층을 향해 본인의 체포가 임박했음을 알린 것이다. 트럼프가 소셜미디어에 올린 것은 “집결해서 항의하라”, 그리고 “우리나라를 되찾자”라는 내용이었다.     이후 뉴욕의 맨해튼 지역 곳곳에 광적인 지지자들이 모였고, 지역의 공화당 관계자들도 그를 방어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트럼프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던 보수 언론 폭스 뉴스도 순식간에 그를 엄호하기 시작했다.  폭스 뉴스의 진행자인 터커 칼슨은 트럼프의 ‘성관계 입막음’에 대해 “유명인에게는 일반적인 것이고, 이런 일에 대해서 말하지 않도록 돈을 지불하는 것은 현대 미국에서 흔한 일”이라고 방송을 통해 트럼프를 옹호했다.      공화당 하원의원들은 지지자들이 모이기도 전에 목소리를 냈다. 트럼프가 체포 임박을 주장한 지 불과 몇 시간 후에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은 앨빈 브래그 맨해튼 지검장을 향해 “터무니없는 권력 남용이며, 정치적 동기가 있는 기소”, “민주주의를 전복시키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매카시 의장은 “트럼프가 포르노 배우에게 지불한 돈은 개인 돈이라서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트럼프는 그러한 사실을 숨기려고 하지 않은 용기가 있다”고 오히려 추켜세우면서 트럼프를 옹호했다. 그리고 20여 명의 연방하원 의원들로부터 브래그 지검장을 향한 공격이 빗발쳤다.     로이터 통신의 여론 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70%가 트럼프의 혐의를 사실로 생각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54%는 뉴욕 검찰의 트럼프 수사를 정치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트럼프의 캠페인 전략은 바이든 정부의 정치 수사 피해자란 프레임을 고수하는 일이다. 지난해 FBI(연방수사국)의 자택 압수 수색 후 있었던 지지율 상승효과를 이번에도 기대한다는 전략이다. 기소에서 재판까지는 지지층을 전투적으로 결집하기 위한 트럼프 진영의 계산된 전략이다.  론 드샌티스의 미지근한 ‘모른 척 대응’에 빨간 불이 켜졌다.  김동석 / 한인유권자연대 대표워싱턴 읽기 트럼프 캠페인 도널드 트럼프 사업적 전략 부동산 사업가

2023-04-04

[워싱턴 읽기] 공화당, 정상으로 가는 길

뉴욕에 살고 있는 올해 77세의 에드워드 콕스는 닉슨 전 대통령의 사위다.  프린스턴대와 하버드 법대를 졸업한 콕스는 1971년 닉슨 대통령의 장녀 패트리샤 닉슨과 결혼했다. 레이건 행정부에서 경제 관련 고위직을 역임했고 유명 로펌에서 국제무역 관련 업무로 명성을 날렸다. 오랜 기간 뉴욕주립대학의 이사로 뉴욕주 대학 공교육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다.     중도보수주의의 정통 공화당원인 그는 조지 파타키가 1996년부터 뉴욕주지사 3선에 성공하는 데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는 활발하게 정치활동을 했지만 정작 자신이 선출직에 나서지는 않았다.     콕스는 2008년 대선에서는 존 매케인 캠프의 핵심 역할을 했다. 당시 필자는 뉴욕 한인사회에 오바마 캠프 관계자와 매케인 캠프 관계자를 초청해 토론회를 개최했는데 매케인 측을 대표해 참석한 인물이 콕스였다. 이런 인연 덕분에 그해 미니애폴리스에서 개최된 공화당 전당대회에 VIP로 초대되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아시아계는 공화당과 더 잘 맞는다는 주장을 하면서 필자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콕스는 2008년부터 뉴욕주의 공화당을 이끌어오다가 2015년 중반부터 등장한 트럼프계와의 갈등으로 2019년 의장직을 내려놓았다. 그러다 지난해 중간선거에서 다시 적극적으로 참여해 뉴욕의 ‘레드 웨이브(Red Wave)’란 성과를 냈다.     ‘청년공화당클럽(Young Republic Club)’이라는 단체가 있다. 젊은 보수주의자들의 정계 진출 관문이다. 대학캠퍼스의 공화당원들이 사회로 나오면 자연스럽게 이리로 모인다. 2000년대 초반 공화당의 스타 정치인으로 등장한 에릭 캔터,폴 라이언, 캐빈 매카시가 모두 여기 출신이다. 그런데 트럼프 등장 이후 지금은 극단주의적인 극우 청년들의 집합체가 되었다. 트럼프 정치에 열광하는 극우파 청년들이 중심인 ‘터닝포인트유에스에이(Turning Point U.S.A)’에 관한 신문기사를 본 사람이라면 이 클럽의 성격과 분위기를 금방 짐작할 것이다.     각 주의 청년공화당클럽은 독립적으로 활동한다. 그중에서 가장 극우적인 클럽이 뉴욕시 맨해튼을 근거지로 하는 ‘뉴욕청년공화당클럽(New York Young Republic Club)’이다. 올해 30세의 가빈 왁스라는 인물이 4년째 회장이다. 왁스의 친구인 비시 부라라는 인물이 2인자다. 트럼프정치 바람을 타고 정치활동에 나선 왁스는 강제접촉, 성적 학대 혐의로 형사 고발된 상태이고 부라는 마약 소지 등 중범죄 관련 혐의를 받고 있다.     이 둘은 지난해 중간선거에서 뉴욕 제3지역구 연방하원선거를 겨냥해 성공을 거뒀다. 껄렁껄렁한 극우 청년들을 자원봉사자로 모집, 가가호호 방문해 표를 모았다. 뉴욕시의 좌파정치 흐름을 우려하는 중산층을 대상으로 색깔 논쟁을 이슈화했다. 2018년 소수계 저소득층을 집중적으로 공략해 경선에서 거물을 무너뜨린 좌파정치의 상징 AOC(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의 역 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그렇게 당선된 인물이 조지 산토스다. 산토스의 선거운동을 주도한 부라는 곧바로 산토스의 워싱턴 사무실 비서실장으로 올라앉았다. 그런데 당선 후 산토스는 학력도 경력도 출신도 모든 것이 허위인 것으로 탄로가 났다.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한 가짜 정치인으로 뉴스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산토스가 바로 이들이 만들어 낸 정치인이다.     금요일이던 지난 3일 밤, 맨해튼 다운타운의 리틀 이탈리아에 있는 지하 술집에는 300여명이 넘는 MZ세대와 그에 인접한 세대의 공화당원들이 모였다. 뉴욕 청년공화당클럽이 후원하는 행사였다. 맥주잔을 들고 시가를 피우는 사람들이 건물 주변과 입구에서 떠들썩했다.     어깨와 다리에 그려진 문신과 ‘MAGA’라고 쓰여진 붉은 모자를 쓴 긴 턱수염의 사람들 모습이 마치 2021년 1월6일 트럼프의 명령을 받고 연방의사당을 향해 몰려가던 군중들을 연상케 한다. 지하 술집의 한복판 의자엔 선거판에서 악마의 화신으로 악명이 높은 로저 스톤도 보인다.  그리고 그다음 월요일, 수백 명의 공화당원은 알바니 공항 메리어트 호텔에 모여서 만장일치로 콕스를 뉴욕주 공화당의장으로 복귀시켰다.     공화당은 급진적인 우파들로 인해 마치 인종차별, 성차별, 동성애 혐오, 폭력을 불사하는 ‘프라우드 보이스’같은 구렁텅이에 빠졌다.  트럼프로부터 공화당을 회복시킬 리더십을 다시 콕스에게 쥐여주려고 지역 내 160여개 카운티 가운데 120개 카운티 공화당 의장들이 모인 것이다.     한편에서는 트럼프 정치의 전투적인 모델을 따르고 있고, 또 한편에서는 재정적 보수주의와 사회문제엔 온건한 노선의 록펠러 공화주의자를 따르고 있음이 보인다. 공화당이 이제 정상으로 가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나마 다행이다.  김동석 / 한인유권자연대 대표워싱턴 읽기 공화당 정상 공화당 전당대회 기간 뉴욕주립대학 뉴욕주지사 3선

2023-03-21

[워싱턴 읽기] 루스벨트를 알면 바이든 선거가 보인다

미국 역사상 대통령을 4번 지낸 유일한 인물인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처음 대통령직에 도전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1932년 1월이다. 그는 뉴욕 주지사로 재임하면서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대공황 시대를 맞아 주 차원의 구호 프로그램인 산업보험, 자연보호 관련 일자리 창출 등으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추진한 ‘뉴딜플랜’의 진원지는 그래서 뉴욕이다.     루스벨트는 뉴욕 주지사를 연임하며 최고의 주지사란 평가를 받았고 마침내 193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그리고 당시 최악의 지지율로 허덕이던 허버트 후버를 압도적인 표 차이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리고 대공황으로 고통받던 국민에게 국가주도로 이른바 ‘뉴딜정책’을 성공시킨다. 1935년 여름부터 경기가 회복세로 전환되는 덕분에 1936년 재선에 성공했다. 1939년 2차 세계대전 발발로 전시 지도력(군수산업)을 발휘해서 1940년 3선 대통령이 되었다. 재선까지만이라는 조지 워싱턴의 전통을 깼다.       루스벨트는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을 수행하면서 1944년 4선 대통령에 도전했다. 전시에 인기가 있었고 심각한 반대 없었다. 루스벨트의 진보적인 사회.경제 정책에 회의적인 사람이 늘고 있었지만 루스벨트를 반대하는 계파는 없었다. 다만, 루스벨트의 건강에 빨간 불이 들어온 것이 가장 심각한 일이었다. 측근들과 당 지도부는 루스벨트의 4선 도전 의지가 워낙 강해서 그의 승계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루스벨트의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되어 1년 이상 살기가 어렵다는 판단을 했다. 부통령인 헨리 월레스가 대통령직을 승계하기엔 그가 너무나 진보적이어서 매우 위험하다고 보았다. 루스벨트 대통령도 그러한 우려 때문에 월레스에겐 알리지 않고 측근들에게 부통령 후보를 교체할 것을 내락했다.     측근들은 미주리주 출신의 재선 상원의원인 해리 투르먼을 후보로 내세웠다. 1944년 7월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는 루스벨트를 만장일치로 대통령 후보로 추대한 후 부통령 후보 선거에서 진통을 겪었다.  1차 투표에서 현직인 월레스가 429대 319표로 이겼지만 과반수를 채우지 못했다. 2차 투표에서는 트루먼이 1031대 319표로 이겨 부통령 후보가 되었다. 민주당의 루스벨트 팀은 그해 대통령 선거에서 대승했다. 측근들의 예상대로 루스벨트는 취임 석 달 만에 급사하고 트루먼이 33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2024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은 경선이 없을 듯 보인다. 최근 바이든 대통령의 의회연설과 화려한 폴란드·우크라이나 방문은 분명히 재선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낸 일이다. 이번 달 초 대통령의 주치의는 바이든이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공화당은 바이든이 고령으로 스스로 몸 간수하기도 어려운 상태이고 정신적으로도 결함이 있다며 네거티브 캠페인을 할 태세다. 공화당의 이런 공격적인 네거티브 캠페인이 먹혀들 여지는 충분해 보인다.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민주당원들조차 바이든의 나이와 건강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음이 나타났다.     1942년생인 바이든은 취임 시점에서 이미 최고령 대통령이 되었고 첫 임기를 마치면 82세로 첫  80대 대통령이란 기록을 세우게 된다. 현직이 또 출마할 것을 결심하면 어떻게 할 방도는 없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가장 존경한다고 밝힌 바이든에겐 더욱 그렇다. 건강상 문제에도 불구 4선에 성공한 루스벨트는 그의 4번째 임기가 시작된 지 82일 만에  63세의 나이로 숨졌다.     루스벨트는 4선 도전 훨씬 전부터 건강에 적신호가 왔다.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침실에 틀어박혀 있어야만도 했다. 심부전을 치료하지 않으면 1년 이상 생존할 가능성이 작다는 진단에도 불구  그는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당시 차기 부통령에게 국가를 이끌 좋은 기회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고 그래서 민주당은 부통령 후보에 더 공을 들였다. 당시엔 부통령 후보도 대통령 후보와 마찬가지로 대의원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제33대 해리 투르먼 대통령이 취임했다.      요즘 워싱턴의 정치 전문가들 입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탄생한 과정에 주목하라는 뜻이다. 민주당 지도부와 측근들은 오히려 승계 문제에 집중해서 부통령 후보를 더 신중하게 따져보는 일이 이 딜레마를 다루는 현명하고 설득력 있는 방법이 아닐까? 김동석 / 한인유권자연대 대표워싱턴 읽기 루스벨트 선거 루스벨트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선거

2023-03-08

[워싱턴 읽기] 폭스 뉴스가 거액 소송 당한 이유

흑인 민권운동이 절정을 이루고 있을 때였다. 1960년 3월29일자 뉴욕타임스(NYT)엔 ‘갈수록 커지는 그들의 목소리’라는 제목의 전면 광고가 실렸다. 어느 민권 단체의 이름으로 실린 이 광고는 남부 앨라배마주의 몽고메리시에서 열린 평화적 민권운동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경찰이 폭력 사용 등 불법을 저질렀다는 내용이었다.     광고 내용은 대부분 사실이었지만 일부 과도한 주장도 있었다. 이에  L.B 설리번이라는 당시 몽고메리시 경찰서장은 이 광고가 경찰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뉴욕타임스를 상대로 50만 달러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앨라배마 지방법원을 거쳐 주 대법원까지 간 이 소송은 원고인 설리번의 승리였다. 하지만 뉴욕타임스는 즉시 연방대법원에 상고했다. 그리고 연방대법원은 1964년 하급법원의 판결을 뒤집는 결정을 내렸다. 설리번 측이 광고가 진실을 외면했다는 증거를 충분히 제시하지 못하는 한 신문사는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 대 설리번’ 판결에서 브레넌 연방 대법관은 ‘실질적인 악의(actual malice)’라는 대단히 중요한 개념을 도입했다. 이것은 취재한 내용이 허위임을 알면서도 이를 기사화하거나 처음부터 진위에 대한 확인 노력을 하지 않았을 경우를 의미하는 법률적 개념이다.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면 공인(권력)에 대한 언론의 비판 기능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 대 설리번’ 판결의 키워드는 ‘실질적인 악의’다. 따라서 언론은 진실만을 보도해야 하고 동시에 그것을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할 때 권력으로부터 법적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판결이다.     투표 시스템 개발업체인 도미니언(Dominion Voting System)사가 지난 16일 대형 언론사인 폭스(Fox)와 그 모회사를 상대로 16억 달러 규모의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도미니언은 2020년 대통령 선거에서 스윙 스테이트인 조지아, 위스콘신을 비롯한 28개 주에서 사용된 투표 기계와 집계 시스템 소프트웨어를 생산. 판매한 회사다.     도미니언 측은 폭스 뉴스가 2020년 대통령선거는 결과가 조작된 부정선거라고 주장하는 트럼프와 그의 지지자들을 옹호하고 도미니언사의 투표 기계와 집계에 오류가 있었다는 사실과 다른 보도를 했다고 소송 이유를 밝혔다. 도미니언 측은 반복적으로 투표기기 오작동과 집계 조작을 보도하는 폭스 뉴스의 유명 앵커들에게 수천 건의 반박 자료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보도는 지속됐다고 주장했다.     도미니언 측이 제시한 증거 자료에 따르면 당시 폭스 뉴스의 스타급 유명 앵커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거짓임을 알면서도 시청률 하락 우려와 광적인 트럼프 지지자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부정 선거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폭스 뉴스의 스타 앵커인 터커 칼슨, 션 해니티, 로라 잉그래햄 등은 자기들만의 대화방에선 트럼프의 선거사기 주장을 “헛소리고 놀라운 미친 짓” 또는 “완전히 진실에서 벗어난 음모”라는 말을 주고받았으면서도 정작 방송에서는 딴소리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폭스 경영진의 눈치를 보면서 현장을 취재하는 기자들의 보도를 무시하고 차단했다. 선거 당일 애리조나주의 개표 결과는 바이든의 0.4%p차 승리라는 특종 보도를 했던 취재기자는 해고됐다. 또 “어떤 식으로든 투표가 손상되었다는 증거는 없다”고 대담하게 트윗을 한 자쿠이 하인리히라는 젊고 재능있는 기자도 있었지만 황금 시간대에 마이크를 쥔 앵커들은 시청률과 돈벌이에만 관심이 있었다. 폭스 뉴스의 간판인 터커 칼슨은 애리조나주의 특종 보도와  하인리히 기자의 트윗에 대해서 “당장 멈추어야 한다. 회사에 상당한 피해를 주고 있다. 시청자가 떠나고 있고 주가가 하락했다. 이건 농담이 아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미국 언론 역사에서 가장 괄목할만한 성과로 기록되는 ‘뉴욕타임스 대 설리번’ 판결이 이번 도미니언의 소송에서 강력하게 소환되고 있다. 핵심은 ‘실질적인 악의’다.  폭스의 ‘실질적인 악의’로 인해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아직도 2020년 대선이 도난당했다는 도널드 트럼프의 거짓 주장을 믿고 있다.  그로 인해 사상 초유의 연방의사당 공격 사태까지 발생했다. 게다가 지금도 진행 중인 폭스의 ‘실질적인 악의’ 덕분에 트럼프는 2024년 대선에 또 나서게 되었다.     2024년 대통령 선거는 2020년에 비해 더 큰 혼란이 예상된다. 아무리 시청률이 높아도 폭스 뉴스는 언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김동석 / 한인유권자연대 대표워싱턴 읽기 폭스 뉴스 폭스 뉴스 명예훼손 소송 당시 폭스

2023-02-21

[워싱턴 읽기] 영 김 의원 위원장 선출, 왜 의미 큰가

지난 한 세기 동안 미 의회에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가장 전문적이고 구체적으로 행동한 의원을 꼽으라면 단연 스티븐 솔라즈 의원이다. 그가 고인이 된 지 20년이 지났지만 한국이 군사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사회를 이루어 낸 과정에 대해 조금이라고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스티븐 솔라즈란 이름이 귀에 익을 것이다.     필자가 만난 최초의 연방 의원이 솔라즈였다. 솔라즈 의원은 1985년 미국에 망명 중이던 김대중 대통령이 귀국을 감행할 때 전두환 정권으로부터의 암살을 우려해 민주·공화 양당의 현직의원 한명씩이 동행하도록 조처를 했다. 당시 솔라즈는 하원외교위 내 아시아태평양소위원장이었다.     솔라즈 의원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의 군사독재를 지지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갖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는 발언과 성명서를 내기도 했다. 이러한 일로 필자는 뉴욕에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솔라즈 의원의 지역구 사무실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그래서 아태소위원장인 그의 역할이 아태지역의 평화와 민주주의 발전인 것을 알았다.     그는 1987년과 1988년 뉴욕 한인들의 한국민주화운동 지지 모임에 단골로 참석했다. 또한 미국의 북한과의 대화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가장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다.  2010년에야 밝혀진 사실이지만 솔라즈 의원은 1980년 7월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해 미국 정치인으로는 최초로 김일성과 만났다. 그 유명한 ‘김일성-솔라즈 함흥회담’이다. 북미관계 최초의 공식접촉이다. 회담 후 솔라즈 의원은 김일성이 미국과의 평화협정 체결과 군축 의사를 있음을 당시 카터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이는 1994년 카터의 평양방문 단초가 되었다 ). 하원 외교위원회 내 ‘아시아태평양소위원장’의 역할이었다.     남북관계에서 가장 인상적인 족적을 남긴 아시아태평양소위원장은 게리 애커맨 의원이다. 뉴욕의 한인 다수 거주지인 플러싱을 지역구로 34년 동안 하원의원을 역임한 애커맨 의원은 유태계로 필자에게 유태계 커뮤니티가 어떻게 미국에서 정치참여운동을 하는지 가르쳐준 의원이기도하다. 그는 남과 북, 그리고 미국과 북한이 대화를 통해서 긴장을 해소해야 한다는 주장을 가장 강력하게 피력해 온 의원이다. 애커맨 의원은 1990년 아시아태평양소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아태소위원장 자격으로 핵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 북한을 방문했고 돌아오는 길은 비행기가 아니라 판문점을 걸어서 넘어왔다.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비무장지대(DMZ)를 걸어서 넘는 기록을 세웠다.  이 역시 아시아태평양소위원장이 할 수 있는 역할이다.   아태소위원장으로 미주한인사회와 가장 가깝게 일하면서 성과를 낸 의원은 사모아 출신의 애니 팔레오마베가 의원이다.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아태소위원장을 역임한 팔레오마베가 의원은 소위원장 선출 후 가장 처음 한 일이 2007년 2월15일 열린 하원 외교위원회의 ‘일본군강제위안부 생존자 증언 청문회’였다. 생존 할머니들의 생생한 증언을 공개적으로 끌어낸 계기가 된 청문회였다. (2017년 이 청문회를 소재로 한 영화 ‘아이 캔 스피크’가 한국에서 흥행에 성공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의 강력한 반대 로비로 많은 의원이 청문회를 방해했지만 팔레오마베가 위원장은 꿋꿋하게 강행했다. 이 청문회를 계기로 미국의 주요 미디어들도 일본군강제위안부 문제를 여성인권 문제로 이슈화했다.     그는 위안부 결의안을 반드시 통과시켜야 한다며 본인 사무실에 필자의 자리까지 마련해 줬다. 팔레오마베가 위원장은 어떤 정치적 어젠다도 인권을 앞서지 못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의 외교·안보 정책이 보수우익 기득권의 이해관계에서만 논의되는 것을 돌파하려고 2009년 가을 한반도 평화 관련 하원 청문회 증인으로 처음으로 한국 내 진보계 인사들을 초청하기도 했다.  ‘일본군강제위안부결의안’은 이를 상정시킨 마이크 혼다 의원이 가장 잘 알려졌지만 결의안 통과 과정에서의 최대 공로자는 팔레오마베가 위원장이었다. 그는 경기도 나눔의 집에 거주하던 20여명의 피해자 할머니들과 의형제를 맺고 한국정부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잘 보살피도록 매년 한국 외교부를 통해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2017년 유타에서 치러진 팔레오마베가 의원 장례식에 혼다 의원과 함께 참석했었다. 장례식 조사에서 혼다 의원은 ‘2007년 일본군강제위안부결의안’ 통과는 전적으로 그의 공로라고 했다. 아태소위원장이 할 수 있는 역할이다.     재선의 영 김 의원이 제 118회기 연방하원 외교위원회의 ‘인도태평양소위원장’에 선출됐다. 새 회기부터 담당 지역이 인도양으로까지 확대 되면서 ‘인도태평양소위원회’로 명칭이 변했다. 김 의원은 한미동맹 및 북한과 중국 관련 사안, 한일관계 등 바이든 정부의 최우선 외교안보 현안을 다루는 의회 기구의 수장이 된 것이다. 김 의원이 재선 의원임에도 불구하고 위원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돋보이는 전문성 때문이다. 또 지난 회기 의정활동을 통해 리더십도 인정받았다는의미다.     민족 역량의 확대 차원에서의 한미관계와 한반도 평화 문제가 다루어지길 기대한다. 한인 인도태평양소위 위원장에 대해 기대감이 커진 한쪽에는 유엔사무총장이면서도 회원국인 북한을 방문하지 않았던 전 한국인 사무총장이 생각났다.    김동석 / 한인유권자연대 대표워싱턴 읽기 위원장 선출 아태소위원장 자격 소위원장 선출 하원 외교위원회의

2023-02-07

[워싱턴 읽기] 론 드산티스를 주목하라

론 드산티스 플로리다 주지사는 대통령직을 향한 강한 열망으로 주목을 받으며 2023년을 시작했다.  그는 지난해 11월 선거에서 거의 득표율 20%p 차이로 경쟁자를 따돌리고 주지사 연임에 성공했다.  이것은 플로리다 주지사 선거 사상 40년 만의 최대 격차다.     이 결과로 그는 2024년 대선 공화당 후보 순위에서 트럼프를 앞섰다. 지난 1월3일 주지사 취임식에서의 “약속의 보장된 땅(A Promised Land of Sanity)”이란 그의 목소리는 주지사가 아니고 백악관을 향한 의지와 열망이다. 플로리다 주 청사 계단에서의 15분짜리 취임 연설은 플로리다주에 대한 드산티스의 계획에 대한 청사진만큼이나 포괄적이고 전국적인 연설이라고 모든 미디어가 논평했다. 드산티스는 연설을 통해 2024년 대선 출마를 포함 그의 큰 야망을 드러냈다.     큰 득표율 차이로 연임에 성공한 드산티스의 정치력은 전국의 공화당 지지자들에게 2024년 유력 대선 후보라는 점을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취임식 전날에는 칵테일 파티와 만찬 그리고 무도회가 열렸다. 플로리다 공화당에 5만 달러 이상 기부한 후원자들에겐 VIP로 대접받는 특별한 기회가 주어졌다. 이들은 백악관으로 향하는 드산티스의 가장 믿음직한 후원자들로 규정된 것을 기뻐했다. 부인인 케이시 드산티스는 캠페인에 참여한 여성 자원봉사자들을 별도로 초청해 만찬을 갖기도 했다.     CNN에 출연한 드산티스의 수석 보좌관은 주지사가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확고한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고 했지만 취임식의 전반적인 모습은 2024년 캠페인을 염두에 둔 것이 분명해 보였다.     2018년 트럼프의 도움으로 주지사가 된 드산티스 입장에서 트럼프와의 경쟁은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트럼프가 배신을 외치면서 물불 안 가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드산티스의 충성을 기대하고 플로리다에 2024년 캠페인 본부를 만들었기에 두 사람의 경쟁은 전 세계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최근 몇 달 동안 2024년에 대한 이야기가 뉴스의 초점이 되면서 두 사람은 점점 대립하는 모습이다.     지난해 중간 선거를 전후해서 트럼프는 드산티스를 ‘보통 주지사’라고 비웃고 그를 위선적인 인물이라며 ‘론드샌시모니어스’라는 별명으로 조롱했다. 드산티스는 이런 트럼프의 비아냥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중간선거 직전의 공화당 지지자 대상 2024년 대통령 후보 여론조사에서 드산티스는 트럼프를 10%p 이상 앞섰고 그 이후 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드산티스는 올해 44세로 공화당의 최연소 백악관 유망주 중 한명이다. 그는 이탈리안 이민자의 아들로 예일대에서 역사를 전공했고 하버드 법대를 졸업했다. 예일대에선 야구팀 주장도 맡았었다. 돋보이는 것은 그의 군 경력이다. 그는 해군 특수부대 법무관으로 관타나모 포로수용소에서 근무했고 이라크전에도 파병됐다.     이후 2012년 플로리다 제6 지구 연방하원으로 당선되었고 상원의원인 마르코 루비오에 도전하려다가 주지사직으로 선회해 2018년 선거에서 제46대 플로리다 주지사에 당선됐다. 연방하원에 입성하면서 당내 우파들의 모임인 프리덤 코커스를 결성했다.     그는 정부지출 축소와 감세를 주장한다. 또 총기협회로부터 감사장을 받을 정도로 총기규제에 반대한다. 불법 이민자들을 타주로 이동시키는 등 반 이민정책을 추구한다. 생명권 보호를 외치며 낙태에 반대한다. 그는 2018년 주지사 경선 당시 자녀들에게 국경 장벽 쌓는 방법을 가르치는 모습과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라는 문구가 적힌 붉은 색 점퍼를 입힌 캠페인 광고로 트럼프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인종차별 역사를 가르치는 것에 대해 인종갈등을 조장한다며 ‘비판적 인종이론’ 교육을 금지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역사적 사실을 감추고 미화하려 한다며 드산티스의 교육 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또 기후변화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정책엔 반대한다. 백신 접종과 마스크 착용 의무화에도 반대했다. 티파티 성향이 뚜렷한 강경한 보수주의자로 주지사 초기에는 트럼피스트로평가되었지만 현재는 트럼프와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다.       드산티스는 그의 두 번째 임기 취임식에서 1860년대의 에이브러햄 링컨과 1980년대의 로널드 레이건, 두 공화당 대통령의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선언했다. 그가 말하는 유산이란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과 레이건 당시 있었던 베를린 장벽 붕괴다.     지도자를 잘못 뽑은 국가들로 인해 지구촌이 몸살을 앓고 있는 상황에서 바야흐로 미국 정치권도 대선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김동석 / 한인유권자연대 대표워싱턴 읽기 플로리다 주지사 주지사 취임식 플로리다 공화당

2023-01-24

[워싱턴 읽기] 새 하원의장 매카시 리더십 발휘할까

조지 부시 정부의 대테러전이 잘못된 전쟁으로 결론이 나면서 공화당 정부의 지지도는 급락했다. 민주당은 1990년대 클린턴의 거품 정치를 정리하기 위한 쇄신작업이 시민들의 (개혁)요구에 부응하면서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 2004년 대선 경선에서 바람을 일으킨 하워드 딘과 그와 연계된 진보 시민운동 ‘무브온’이 그것이다. 덕분에 2006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은 다수당이 되었다. (민주당의 낸시 펠로시가 최초의 여성 하원의장이란 기록을 만들었다)     2008년 대선을 앞두고 경제가 엉망이 됐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때문이다. 시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왔다. ‘월스트리트를 점령하자’가 바로 이거다. 민주당은 2008년 대통령 선거전에서 오바마 바람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상원의 찰스 슈머와 하원의 람 이매뉴얼이 추진한 ‘레드 투 블루 프로그램(Red to Blue Program)’이 그것이다. 이에 대응해 공화당도 ‘영 건수 프로그램(Young Guns Program)’으로 맞섰다.     선거에 연패하는 노쇠한 지도부에 불만을 토로하는 공화당 내 젊은 피 3명이 있었다. 에릭 캔터와 폴 라이언, 그리고 캐빈 매카시다. 40대 초반의 나이에 뛰어난 정치 감각, 부지런하고 과감하며 전문성을 갖춘 캠페인 전략가라는 게 이들의 공통점이다. 당시 젊은 보수주의자들을 찾아 나선 이들을 가리켜 ‘3 Young Guns(3인의 젊은 총잡이)’라고 불렀다. ‘영건스’란 원래 황야를 누비는 젊은 총잡이란 뜻이다. 이들의 과감함을 보며 전문가들은 미국 정계를 뒤흔들 주인공들이라고 평했다.      2008년 등장한 첫 흑인 대통령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수주의 광풍이 불었다. 시민 우익 정치 운동인 ‘티파티’ 다. 영건스 3인방이 이를 놓칠 리 없었다. 티파티를 적절하게 활용해서  2010년 중간선거에서 무려 40여명의 신인을 당선시켰다. 영건스 3인방은 명실공히 공화당 권력의 핵심이 됐다. 2011년 다수당을 탈환한 공화당은 존 베이너 의장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고 캔터가 원내대표, 매카시 원내총무, 그리고 라이언이 (예산)세출위원장으로 자리를 잡았다.        2008년 대선에서 오바마에 패한 공화당의 존 매케인은 러닝메이트였던 알래스카 출신의 정치신인 세라 페일린에게 절대로 극우 보수주의자들과 함께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매케인은 ‘티파티’란 극우 정치 운동의 반지성적 인종주의를 봤던 것이다. 영건스 3인방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3인방의 선두인 캔터가 티파티와 거리 두기를 언급했다. 하지만 캔터는 티파티의 집중 공격을 받아 2014년 경선에서 낙선하고 말았다. 반면 티파티의 공격에 직면한 매카시는 이들과의 야합을 결정한다. 그는 티파티의 지지를 받아야 베이너 의장의 후임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매카시가 중도 보수주의에서 극우 쪽으로 기울게 된 이유다.  이때부터 매카시는 극우주의자들에게 발목이 잡혔다.     캔터가 아웃되고 베이너가 은퇴를 발표했다. 매카시에게 의장직이 가는가 했지만 티파티의 퇴조와 본인의 말실수로 인해 라이언이 의장이 됐다. 라이언은 최연소 하원의장의 기록을 썼다.  이후 티파티는 2016년에 다시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트럼프가 대선후보로 나타나자 그 뒤로  몰려왔다.  2016년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트럼프 정치에 견디지 못한 라이언은  2018년 정치은퇴를 선언했다. 영건스 3인방 중 매카시만 남았고 공화당의 1인자가 되었다.      지난 중간선거에서 퇴조를 보였지만 극우 세력은 여전히 공화당 내 강경 입장을 고수하는 세력으로 남아있다.  40여명의 ‘프리덤 코커스(Freedom Caucus)’ 소속 의원들이 핵심이다.     연방하원의 새 회기가 시작되면 첫날 첫 순서가 의장 선출이다.  의장 앞에서 의원들이 선서해야 모든 것이 시작된다. 지난 1월3일 118회기 연방의회가 개원했다. 현재 하원은 민주당 212명, 공화당 223명이다. 그런데 공화당 223명의 의원 중 트럼프 정치에 동조하는 20여명의 극우파 의원들이 매카시 의장 선출에 반대하고 나섰다.  2021년 1월6일  트럼프에 동조해서 의사당을 공격한 반란에 동조한 세력이다. 그런 극우파 의원들이 매카시의 발목을 잡았다. 매카시는 200여명의 의원은 뒤로한 채 협상 과정에서 그들의  요구를 거의 다 들어줘야 했다. 세력은 퇴조했지만 트럼프 정치는 살아있다.       황야의 젊은 총잡이  3명중 혼자남은  매카시가 마침내 하원의장이 됐다. 하원 입성 15년 만이다. 그는 15번의 의장 선출 투표 끝에  그렇게도 꿈에 그리던  워싱턴 권부의 2인자,  하원의장이 됐다. 하지만 매카시는 대책 없이 티파티를 끌어들였고, 또한 트럼프 정치에 투항했다. 정치의 본질보다는 본인의 야망을 위해 영건스의 신념을 팔아넘긴 것이다. 그가 의장은 되었지만  진정한 리더가 될 가능성은 없어 보이는 이유다.  김동석 / 한인유권자연대 대표워싱턴 읽기 하원의장 매카시 원내대표 매카시 여성 하원의장 정치신인 세라

2023-01-10

[워싱턴 읽기] 트럼프 처리에 관한 역사의 교훈

미국 최악의 대통령을 들라면 민주당 출신의 제17대 앤드루 존슨 대통령이다. 그는 남북전쟁 당시 남부의 테네시 출신이면서도 링컨 대통령의 뜻에 동조했다. 남부가 차례로 연방을 탈퇴했지만 그는 연방에 남아있었다. 노예제를 반대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연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그는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다. 남부 출신이면서 연방 탈퇴에 반대해 북부에서는 정치인으로서의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출신 지역인 테네시 등 남부지역으로부터는 배신자 소리를 들었다. 링컨 대통령은 분열된 국가를 통합하는 차원에서 존슨을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지명했다. 이는 미국 역사상 대통령과 부통령의 소속 정당이 다른 유일한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존슨은 부통령이 되었지만 시작부터 좋지 않았다. 정치적인 포지션이 너무나 어중간해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취임식에 참석하기 어려웠던 그는 위스키를 잔뜩 마시고 취임식장에 입장했다. 그에게 주정뱅이 부통령이란 말이 생긴 이유다. 그런데 그를 부통령으로 만들고 적극적으로 옹호했던 링컨이 불과 취임 한달 만에 포드 극장에서 암살되는 일이 벌어졌다. 링컨의 사망으로 존슨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선거로 선출되지 않은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100년 후인 1974년 닉슨의 사임으로 제럴드 포드가 또 선거로 선출되지 않은 대통령이 되었다)     존슨은 현직 대통령임에도 경선에서 패해 일찌감치 재선에 실패했다. 의회에 정치적 기반이 없어 재임 동안 수차례 탄핵을 당하는 등 시달림을 당했지만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는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기 때문에 미국 역대 대통령 평가 순위에서 늘 최하위에 머문다. 노예제도를 고수하는 남부 보수파에 힘을 실어줘 흑인 인권을 100년 뒤로 미룬 원흉이라고 지적받는 대통령이다.     존슨의 후임으로 남북전쟁의 영웅인 율리시스 그랜트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존슨은 그랜트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던 공화당과의 관계가 험악해져 후임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이후 152년 뒤인 2021년 1월  도널드 트럼프가 후임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는 기록을 이어받았다) 존슨은 탄핵 소동으로 인해 재선은 꿈도 못 꾸고 사실상 정치 생명이 끝난 상태에서 백악관을 떠나게 되었지만 명예를 회복한답시고 정계에 남았다. 이후 테네시주의 상원의원이 되긴 했지만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사망 직전 존슨은 몸이 마비 상태가 된 상황에서도 의사의 진료를 거부하는 고집불통의 면모를 보이면서 의자에서 굴러떨어져 숨졌다.     지난 12월19일 연방의회내 ‘1월6일 위원회( House  Jan.6  Committee )’의 마지막 청문회장엔 150여년 전의 존슨 대통령이 소환되었다. 위원회의 부위원장인 리즈 체니 의원이 남북전쟁 당시 북군 오하이오 보병연대의 중대장으로 싸운 자신의 고조부 사무엘 플리처 체니를 소개하면서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기록되는 존슨과 2021년 1월 의사당 반란을 조장하고 공모하고 방관한 트럼프를 같은 반열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하원으로부터 탄핵을 당했고 반란을 조장했으며 국가적 위기를 방관한 대통령으로 존슨과 트럼프는 닮은꼴이다. 후임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도 같다.     ‘하원 1·6 위원회’의 마지막 청문회가 150여 년 전의 존슨 대통령을 소환한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탄핵당한 전직 대통령을 다시는 공직에 나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2021년 1월6일 연방의사당을 공격한 폭도들의 반란을 조사한 ‘하원 1·6위원회’는 트럼프 대통령을 ‘반란 또는 선동에 관한 법률(Violating 18 USC 2383)’에 의해 처벌해야 한다는 의견을 강하게 냈다.  2000년 1월23일 발효된 이 법은 누구든지 미합중국의 권위 또는 법률에 반하는 반란이나 폭동을 선동하거나 가담 또는 지원한 자는 벌금을 물거나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고 미합중국에서는 어떤 직책도 맡을 수 없다는 내용이다.     트럼프는 중대범죄 행위로 인해 하원으로부터 탄핵당한 바 있고 ‘1·6 위원회’의 형사 처벌 권고도 있었다. 트럼프가 다시는 선출직, 또는 임명직 공직을 맡아서는 안 되는 이유다. 김동석 / 한인유권자연대 대표워싱턴 읽기 트럼프 역사 존슨 대통령 역사상 대통령 링컨 대통령

2022-12-27

[워싱턴 읽기] 하킴 제프리, 그는 누구인가?

동부지역 한인이민자들의 첫 정착지인 뉴욕시 퀸즈는 미국에서 가장 다양한 인종이 자기 문화와 삶의 방식을 당당하게 뽐내는 곳이다. 그래서 퀸즈(Queens)는 가장  활력있는 도시다. 1985년 월터 먼데일의 러닝메이트로 최초의 여성 부통령 후보였던 제럴린 페라로가 이 지역 출신이다.  페라로가 떠난 이후로는 뉴욕 경찰을 지배하는 아이리시 계의 정계 진출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최근 이 지역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진보의 아이콘으로 등장한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즈 연방하원의원 덕분이다. 20대의 남미계 풀뿌리 활동가였던 코르테즈 의원은 2018년 이 지역 예비경선에서 아이리시 계가 공들여 키워온, 누가 봐도 낸시 펠로시 이후의 민주당 리더였던 조 크라울리를 꺾었다. 국가대표가 예선에서 탈락한 대이변이었다.  2014년 티파티의 위력에 단숨에 날아간 공화당 대표 에릭 캔터와 매우 닮은 꼴이다.     오바마 정치가 저물어가는 때에 크라올리는 뉴욕이 민주당의 앞날을 책임진다는 생각에 낸시 펠로시, 스테니 호이어, 제임스 클라이번 이후를 대비했다. 그리고 2010년 뉴욕시 브루클린에서 혜성같이 나타난 하킴 제프리를 늘 옆에 끼고 다녔다. 인종, 이민, 가치 이슈에선 당내 진보계와 궤를 같이하지만 리더십을 발휘하는 중앙당 차원에서는 중도적인 위치를 확고히 했다. 2016 대선에서 버니 샌더스의 돌풍에 호되게 얻어맞은 크라울리는 2018년 중간선거에서 그들의 표적이 되어 신예 코르테스의 도전에 참패를 당했다.     예선에서 패한 크라울리는 중앙당의 권력 기반을 빠르게 제프리에게 넘겨줬다. 뉴욕의 바닥 정치에서 훈련된 제프리가 하늘이 내린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제프리는 크라울리의 자리인 하원 민주당 간부회의 의장직을 거머 쥐었다. 2019년 1월부터 펠로시 하원의장, 호이어 원내대표, 클라이번 수석총무, 그리고 크라울리를 대신해서 등장한 제프리의 순서로 당 서열이 정해졌다.  펠로시, 호이어, 클라이번  3명은 이미 80세를 훌쩍 넘겼다. 2020년 대선에서 쏟아져 나온 세대교체 목소리에 매우 자연스럽게 제프리가 민주당 내 차기 리더로 떠오른 것이다.        루디 줄리아니의 경찰정치가 기승을 부리던 1997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루이마 폭행 사건이 터졌다. 흑인 애브너 루이마가 뉴욕경찰국 소속 백인 경관에게 무자비한 폭행과 강간을 당한 사건이다. 당시 필자는 다른 아시아계와 연대해 흑인들의 민권투쟁에 동참했다. 그때 시위 현장과 법정에서 펄펄뛰던 20대의 흑인 변호사 하킴 제프리를 처음 만났다. 그리고 20년 후인  2018년  브루클린 그의 선거 캠페인에서 서로 알아보았다. 그는 뉴욕에서 흑인민권운동을 한 커뮤니티 활동가 출신이지만 지금은 정치인이다. 그도 내공이 탄탄한 정치인들이 갖고 있는 특징을 갖고 있다. 경찰에 대항한 그의 투쟁 경력은  LA시장에 당선된 캐런 배스에 버금가지만 권력의지가 강하다. 그는 기다리지  않고  도전했다. 단호함이 부족하다며 뉴욕주 현역의원에 도전해 주하원직을 쟁취했고, 2010년 선거구 재조정 기회를 이용해 2012년 연방하원의원에 도전 중앙정치에 진입했다.     브루클린 토박이인 제프리는 뉴욕 주립대학인 빙햄톤에서 정치학을, 조지타운에서 공공정책을 공부했고 뉴욕대 로스쿨을 거쳐 1997년 변호사가 됐다. 배추머리 민권운동가로 유명한 알 샤프톤의 브레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지난 11월30일 하원 민주당은 제프리 의원을 만장일치로 차기 당 대표로 선출했다. 대표로 선출된 제프리는 “청년, 노인, 이민자, 재향군인, 가난한 자,  병든 자, 고통받는 자,  길을 잃은 자, 소외된 자…, 하원 민주당원은 국민을 위해 싸울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연방 상·하 양원에서 최초의 흑인 당 대표라는 역사를 만들었다.     펠로시 의장이 대표에서 물러난 것은 민주당의 전격적인 세대교체 신호다. 하원 민주당은 최초의 여성 하원의장에 이어 최초의 흑인 하원의장이란 기록도 세우게 될 것이다.         김동석 / 한인유권자연대 대표워싱턴 읽기 제프리 펠로시 하원의장 뉴욕시 브루클린 하원 민주당

2022-12-13

[워싱턴 읽기] 희망은 ‘세대교체’

민주당은 중간선거전에서 청년 유권자들의 덕을 톡톡히 봤다. 청년들은 자신의 권리와 민주주의가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으로 성별, 인종, 계층을 뛰어넘어 투표를 했다. 이번 중간선거에서 18세 이상 35세 미만의 투표율은 지난 30여년 중간선거 중 가장 높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MZ(Z세대에 밀레니엄세대를 포함)세대 덕분에 민주당은 상원 다수당을 유지했다. Z세대와 밀레니엄 세대가 민주주의를 수호하라는 역사적 소명에 응한 것이다.  그들은 거짓과 분열의 정치에 주목했고 여성혐오와 인종주의를 거부했다. 젊은 세대가 민주당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공화당을 거부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통적인 공화당 기반인 백인 유권자들 사이에서도 가장 어린 MZ세대가 대거 이탈해 민주당을 지지한 것으로 조사됐다. 중간 추정치에 따르면 35세 이상 백인 대다수가 공화당에 투표했지만 30세 미만의 백인 58%는 민주당 후보에게 투표했다.     30대와 40대의 투표 참여율이 대폭 높아지는 현상은 트럼프 집권 2년 차부터 나타났다. 2017년 버지니아 샬러츠빌에서 발생한 인종폭동을 트럼프 대통령이 옹호한 것에 대해 젊은 층이 노골적으로 반응을 보였다. 2018년 중간선거의 투표율이 기록적으로 높았고 특히 MZ세대의 투표율이 두드러졌다. 덕분에 2019년 1월부터 다시 연방하원에서 민주당의 낸시 펠로시가 의사봉을 쥐게 되었던 것이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사태에도 불구하고 인종정의라는 슬로건으로 전국에 번진 BLM이 미국의 청년들을 적극적 정치참여로 이끌었다. 2020년 대통령선거에서 밀레니엄세대와 Z세대 구성원은 애리조나, 조지아, 펜실베이니아, 위스콘신, 미시간에서 조 바이든이 도널드 트럼프를 이기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낙태금지 판결에서 알 수 있듯이 민주당과 공화당의 젊은 유권자들은 자신의 권리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권리에 대해서 극도로 우려하고 있다. 오늘날 미국 젊은이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신보다 삶의 여건이 취약한 사람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싸운다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는 것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이번 중간선거에서도 젊은 층은 여성이 자신의 신체를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위해 투표소로 향했다. 건강한 지구를 물려받을 권리, 학교에서 안전함을 추구할 권리, 양질의 교육과 신체의 건강을 위한 권리도 마찬가지다.  지난 9월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정치연구소의 조사에 의하면 젊은 미국인의 59%는 자신의 권리가 공격받고 있다고 믿고 있으며, 73%는 다른 사람의 권리가 위협받고 있다고 우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본권을 옹호하고 확대하는 것이 미국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중요한 초당적 이슈로 조사되었다.   이번 중간선거 출구 조사에 의하면 애리조나의 현직 민주당 연방상원의원인 마크 캘리의 경우 18세에서 29세의 유권자로부터 68%의 지지를 받은 반면 트럼프에 의해서 지명된 공화당 후보인 블레이크 마스터의 득표율은 20%에 불과했다. 펜실베이니아의 민주당 상원 후보인 존 패터맨은 청년투표에서 70%를 얻은 반면에 공화당 후보였던 메멧 오즈는 겨우 28%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네바다에서는 현직 민주당 상원의원인 캐서린 마스토가 젊은 층으로부터 64%의 득표율을 기록해 공화당 후보의 31%를 압도하며 승리했다. 이처럼 경합지역 젊은 유권자들의 투표 경향이 선거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2024년 선거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MZ세대에 주목해야 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을 막고 공정과 평등에 초점을 맞추며 다양성을 강조하는 캠페인으로 MZ세대 유권자에 다가서야 할 것이다. 기존의 미국 유권자는 이미 비슷한 숫자로 민주와 공화, 양당으로 나누어져 있다. 하지만 이제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 MZ세대가 본격적인 유권자 블록으로 등장하고 있다. MZ세대는 미국의 최고 보편가치로 다양성을 강조하는 교육을 받은 세대다. 여기에서 미국의 희망을 본다.  김동석 / 한인유권자연대 대표워싱턴 읽기 세대교체 희망 민주당 후보 청년 유권자들 권리 학교

2022-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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